제1절 개관
일제(日制)의 무조건 항복으로 8ㆍ15광복의 날을 맞이한 지 약 3년만인 1948년에 한국헌정사상 최초의 ‘5ㆍ10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단독선거ㆍ단독정부 반대’라는 구호아래 남북협상에 참가한 상해임시정부계(上海臨時政府系)의 김구(金九)ㆍ김규식(金奎植) 등 민족진영의 일부 인사들에 의하여 거부되고, 또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계열의 방해공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6개 선거구를 제외하고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여기서 선출된 198명의 국회의원들로 제헌국회(制憲國會)가 구성되었다.11)
제헌국회는 그 조직구성12)이 끝나자 대한민국의 법적 기초가 되는 헌법제정작업에 착수하여 1948년 7월 17일 건국헌법(建國憲法)이 공포ㆍ발효되고, 동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선포되었다. 헌법이 제정된 지 40여년 만에 전후 12차례에 걸쳐 개헌안이 제출되고, 9차에 걸친 잦은 개헌이 단행되었는데, 역대 헌법들은 예외없이 권력분립제(權力分立制)를 채택하였다.13)
헌법 제101조 제1항이 “사법권(司法權)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法院)에 속한다”라고 하는 것은, 헌법에 별도의 규정이 없는 한 실질적 의미의 사법에 관한 권한은 원칙으로 법원의 권한에 속한다라고 하는 ‘법원사법(法院司法)의 원칙’을 규정한 것이다. 이 조항은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라고 하는 헌법 제40조 및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首班)으로 하는 정부에 속한다”라고 하는 제66조 제4항과 더불어 현대 헌법에 있어서 권력분립(權力分立)에 관한 규정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사법권의 독립’을 선언한 규정이기도 하다.
사법권의 독립을 위해서 사법을 담당하는 기관인 ‘법원’의 독립과 재판을 담당하는 법관의 독립을 제도적으로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행 헌법도 제101조 제1항에서 입법부와 행정부로부터 법원을 독립[기관의 독립]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102조 제3항에서는 “대법원과 각급 법원의 조직은 법률로 정한다.”[법률에 의한 법원조직]라고 하고, 또 제108조에서는 “대법원은 법률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범위 안에서 소송에 관한 절차, 법원의 내부규율과 사무처리에 관한 규칙을 제정할 수 있다”[법원의 자율권]라고 하여 법원의 독립을 뒷받침하고 있다.
11) 『國會十年誌』(國會事務處,1958, 1~3p)에 의하면, 총유권자 8,132,517명 중 96.4%가 선거인 명부에 등록하고, 전등록자의 95.5%가 투표에 참가하였으며, 그 중 96.3%에 해당하는 투표가 유효투표였다. 그리고 총 입후보자 942명 중 198명이 당선되었다.
소속 정당별 당선자로는 大韓獨立促成國民會 53명,大韓民主黨 29명, 大同靑年團 14명, 民族靑年團 6명, 기타 단체 11명, 그리고 무소속 85명이 있다.
12) 1948년 5월 31일 정식으로 국회가 소집되어 의장에 李承晩, 부의장에 申翼熙와 �東元을 선출하였다.
13) 그러나 권력분립의 정도와 내용은 약간씩 차이가 나서, 건국 헌법은 비교적 행정부 우위의 권력분립제를, 1960년 헌법은 비교적 균형이 유지된 권력분립제를, 1962년에는 다시 행정부 우위 , 1972년 헌법과 1980년 헌법은 행정부의 절대적 우위를 내용으로 하는 권력분립제를 규정하였다.
(權�星,『憲法學原論』,法文社,1988,pp.605~606)
그리고 헌법 제103조에서는 “법원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라고 하여 구체적 사건을 재판함에 있어서 입법ㆍ행정부의 외부기관은 물론 사법부 내에서도 상급법원이나 소속 법원장의 지시나 명령을 받지 않고[외부작용으로부터의 독립]오직 헌법과 법률 그리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만[헌법과 법률 및 양심에의 구속]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법관의 직무상ㆍ재판상ㆍ실질적[물적] 독립’을 보장하고 있고, 제105조에서는 법관의 임기제와 연임제(連任制)를, 제101조 제3항에서는 법률에 의한 법관의 자격을, 제106조 제1항에서는 법관의 신분보장을 각각 규정하여, 법관의 직무상 독립을 뒷받침하기 위한 ‘법관의 신분상[인적] 독립’을 보장하고 있다.
여기서 속초시의 사법의 역사를 보려면, 먼저 사법제도 전반의 변천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중세 이후의 전제군주국가(專制君主國家)에서는 입법ㆍ사법ㆍ행정의 모든 국가권력이 군주 일 개인의 수중에 집중되어, 공정ㆍ타당하여야 할 재판까지도 오히려 왕권의 일부로 간주됨으로써 군주의 관방(官房)에 의한 관방사법(官房司法: Kabinettsjustiz)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관방사법에 의한 자의적인 재판을 통하여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얼마만큼 위협을 받았는가는 각국의 재판사(裁判史)가 입증하여 보여주고 있다.
한말 고종 31년(1894)은 우리나라에서 개화와 변혁이 일어난 해로 당시 법무대신 서광범(徐光範)이 고종에게 사법제도의 근대화 작업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근대적으로 제도화된 사법제도가 나타난 것은 고종 32년 법률 제1호로 재판소구성법(裁判所構成法)이 공포된 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갑오경장(甲午更張: 1894년) 이전의 법제(法制)는 봉건적 절대군주국가로서의 중국 법제를 모방한 것이었다.
이 시대의 사법제도, 즉 민사상의 분쟁해결 및 형벌의 결정이라는 사법작용은 그것이 행정 내지 정치과정의 일부로써 시행되었다. 법관은 행정ㆍ입법 및 사법의 통괄자인 군주의 사용인 내지 보조자로서 일하는 체제였으며 권력분립이나 사법의 독립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따라서 사법도 행정의 편의에 이용된 실정이었지만, 그 시대에 있어서도 재판은 정확하고 공정ㆍ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근본원칙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삼국시대 이전의 상고시대(上古時代) 부족국가들도 천신(天神)에게 제사한 다음 죄인에 대한 형벌을 결정하고 백성의 원통한 일을 판결하며 그 밖에 부족민들의 분쟁의 해결을 부족수장(部族首長)의 전결로써 해결하였으며, 민족 최초국가인 고조선시대에는 범금팔조법(犯禁八條法) 등 범죄와 형벌제도가 있었다.
그 내용은 ① 살인자는 즉시 죽이고, ② 사람을 다치게 하면 곡물로 배상케 하고, ③ 도둑은 그 재물을 몰수하고 그 집의 노예가 되고 여자는 노비가 되게 하고, ④ 소도(蘇塗)를 훼손한 자는 금고(禁錮)에 처하며, ⑤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케 하고, ⑥ 열심히 일하지 않는 자는 부역을 시키며, ⑦ 삿된 음행을 하는 자는 볼기로 다스리고, ⑧ 사기자(詐欺者)는 훈계하여 방면하나 스스로 속죄하면 공표를 면해줘도 민속으로 결혼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로써 백성들은 끝내 도둑질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을 닫는 일이 없었고, 부인은 정신(貞信)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밭ㆍ들ㆍ도읍을 막론하고 음식을 바쳐 제사 올리니, 어질고 겸양하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단군 11세 도해단군(道奚檀君)은 사형제도를 폐지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고구려시대에는 민간 분쟁의 해결과 형벌의 결정은 친국[親鞫: 국왕이 스스로 궁성 내에서 법정을 개정하고 재판하는 것]으로 하거나 중앙 또는 지방관리의 재량에 맡겨졌다. 대무신왕(大武神王) 및 소수림왕(小獸林王)14)은 재판의 신속한 처리를 촉구하는 조직을 제도화한 기록이 있고, 통일신라 때에는 좌우이방부(左右理方部)라는 사법기관(司法機關)을 설치하여 재판사무를 전담케 한 기록이 있으나 그 실상은 다른 행정관도 사법권을 겸장하고 있었다.
14) 고구려가 고대 국가로서의 관료조직을 갖추게 된 것은 대체로 율령정치가 시작된 소수림왕 때였고 평양천도 이후 더욱 정비되었다. 고준환, 『하나되는 한국사』, 범우사, 1992, p.200
고려시대에는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중앙에 형부(刑部)를 설치하여 그 장관인 형부상서(刑部尙書)의 책임 하에 사법사무를 전담케 하고, 지방에 있어서는 도행정관(道行政官)인 감사(監司)와 하급 지방관인 지군사(知郡事: 지금의 군수에 해당한다)ㆍ감무(監務) 등이 있어 군인이나 병역의무자에 대하여서는 병마(兵馬) 또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재판사무를 관장하였다. 그리고 지방관이 처리하던 사법사무를 감독하기 위하여 안렴사(按廉使)를 두어 지방을 순찰케 하였으며, 또 공무원의 비위사실을 감찰ㆍ규탄하는 기관으로 중앙에 어사대(御史臺)를 두었다가 후에 금오대(金吾臺)ㆍ감찰부(監察部)ㆍ사헌부(司憲府) 등으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
재판절차에 있어서도 삼복(三覆)이라 하여 오늘날의 삼심제(三審制)와 비슷한 제도를 채택하고 상급관청에 대한 항소를 허락하였고 예종 원년(1106)에는 고문금지의 준칙이 발표되는 등 사법제도의 현저한 발달을 보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아직 근대적 권력분립 사상이 발달되지 않았으므로 사법권의 독립원칙은 서 있지 않았으며 사법기관은 전제군주의 보좌기관 내지 간쟁기관(諫爭機關)이라는 체제하에서 움직였다. 1심(審) 겸 최고심을 국왕이 관장하고 국왕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궁중에 수시로 친국청(親鞫廳)을 설치하여 국왕 스스로 대신들을 거느리고 재판하였다. 이 때의 중앙사법기관으로는 의금부ㆍ형조ㆍ한성부가 있었는데, 이를 삼법사(三法司)라고 하였다. 또한 관리의 비위를 감찰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하고 있는 기관으로는 사헌부가 있었다.
조선초기에 설치된 사헌부는 관헌(官憲)의 기강감찰을 담당하는 외에 그릇된 풍속을 교정하며 억울한 백성의 사정을 밝히고 외람된 행위를 금지케 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삼았다. 장관은 종이품으로 대사헌(大司憲)이라고 불렀고 그 밑에 집의(執義)ㆍ장령(掌令)ㆍ지평(持平)ㆍ감찰(監察) 등의 관원을 두었다. 의금부는 국왕의 명령에 의해서만 활동할 수 있었던 특수범죄를 처리하는 기관이며,15) 그 우두머리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使)라고 불렀으며, 그의 직위는 종일품이었다. 그 밑에는 지의금부사(知義禁府使)ㆍ동지의부사(同知義府使)ㆍ의금부도사(義禁府都使) 등이 있었는데, 주로 왕족이나 관리의 범죄 및 반역죄에 해당하는 죄를 재판하였다. 의금부는 뒤에 의금사(義禁司)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법무아문(法務衙門) 권설재판소(權設裁判所)로 변경되었고 그후 고등재판소, 평리원(平理院) 등의 전신이 되었다. 중앙 6조 중의 하나인 형조는 지금의 법무행정과 일부 재판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여지며 후에 법무아문으로 바뀌었다가 법부(法部)로 변경되었다. 형조의 장관은 형조판서라고 불렀고 그 예하에 상복사(詳覆司: 중죄에 대한 覆審擔當)ㆍ고율사(考律司: 법령조사담당)ㆍ장금사(掌禁司: 감옥과 범죄수사담당)ㆍ장예사(掌隸司: 노예와 포로에 관한 사항 담당)의 4사를 두었고 그 밖에 율학청(律學廳)ㆍ전옥서(典獄署)ㆍ좌우포도청(左右捕盜廳: 후에 병조 소속)을 관장하였다.
한성부는 수도행정 및 사법을 담당하여 전국의 전택(田宅)에 관한 소송업무 등을 관장하였으며, 장관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이라고 불렀다. 한성부의 예하에는 5부를 두어 경미한 사건의 재판사무도 관장하게 하였다. 그 외에도 직수아문(直囚衙門)이라 하여 인신구금의 권한이 부여되어 있던 관부(官府)로서 병조(兵曹)ㆍ승정원(承政院)ㆍ종부사(宗簿司)ㆍ비변사(備邊司)ㆍ포도청(捕盜廳) 등에서도 경미한 사건에 대한 처벌의 권한도 가졌다.
15) 왕족의 범죄, 관원으로서 관기를 문란하게 한 자, 국사범, 모역죄 및 반역죄의 대옥사건, 사헌부가 탄핵한 사건, 綱常(三綱五倫)에 관한 범죄사건 등을 관장하였고, 후일에는 양반의 자손까지도 治罪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서울地方檢察廳史』, 서울지방검찰청, 1985, p.16
지방사법기관으로는 관찰사ㆍ수령ㆍ암행어사 등을 들 수 있다. 관찰사는 전국을 8도로 나누어 각 도의 행정ㆍ사법을 통할하고 유배형 이하의 형사사건을 초심으로 직접 재판하고 민사사건에서 관하 수령의 재판에 대한 복심을 행하였다. 관찰사 관하 부윤ㆍ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ㆍ목사(牧使)ㆍ도호부사(都護府使)ㆍ유수(留守)ㆍ군수(郡守)ㆍ현령(縣令)ㆍ현감(縣監)을 통털어 수령이라 하는데, 이는 일반행정 이외에 태형(笞刑) 이하의 형사사건과 일반 민사사건의 초심을 행하였다. 암행어사는 국왕이 임시 파견하는 비밀사신으로 수령의 재판을 재심하는 부정기 순회재판관의 역할도 하였다.
1894년 청ㆍ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자 일본은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겠다는 미명하에 당시 일본 공사 오도리(大鳥圭介)로 하여금 한국의 개화당을 움직여 대원군을 받들고 민씨(閔氏)일파의 사대당을 몰아낸 뒤 김홍집(金弘集)을 수반으로 하는 개신내각(改新內閣)을 조직하여 제반제도를 개혁하였다. 이것을 바로 고종 31년(1894)에 일어난 갑오경장이라 한다. 이 때에 김홍집 내각은 장기간 적폐되었던 서정(庶政)을 혁신한다는 명목 하에 관제를 개정함에 있어 형조를 법부(法部)로 개칭하고 법부 관장 하에 선진국의 사법제도를 모방하여 ‘재판소구성법’(裁判所構成法: 1895년 3월 25일 법률 제1호)을 제정ㆍ공포하여 법부 산하에 지방재판소, 한성 및 인천 기타 개항장재판소ㆍ순회재판소ㆍ고등재판소ㆍ특별법원 등 5종의 재판소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직원으로는 판사ㆍ검사ㆍ서기ㆍ정리를 두도록 하고 고등재판소와 특별법원에는 따로 재판장을 두고, 판사ㆍ검사는 일정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 자를 임명하기로 하였다.
지방재판소와 한성 및 인천 기타 개항장재판소는 일반 형사사건을 재판함을 원칙으로 하되 2인 이상의 판사를 두는 경우에는 단석(單席) 또는 합석으로 재판할 수 있으며 합석의 경우에는 수반판사(首班判事)가 형을 선고하게 되어 있었다. 한성 및 인천 기타 개항장재판소는 일반 형사사건 외에도 외국인으로서 본 국민에 대하여 범한 형사사건까지 처리하게 하였다. 순회재판소는 법무대신(法務大臣)이 지정한 장소에서 매년 3~9월까지의 기간 중 그 지역 안의 지방재판소 판결에 대하여 불복하는 사건을 단독판사로 하여금 재판하게 하였다. 고등재판소는 법부에서 임시 개정하여 한성 및 인천 기타 개항장재판소의 판결에 대하여 불복하는 상소사건을 합의재판하며, 특별법원은 왕족의 범죄에 관한 사건을 심판하는 제도였다. 법문(法文)으로는 이처럼 많은 재판소가 설치되었으나, 실제로 개설된 것은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와 고등재판소뿐이었고 지방재판소는 각 도의 감영(監營) 등에, 개항장재판소는 감리서(監理署)에 합설(合設)되었으며 관찰사ㆍ목사ㆍ감리(監理) 등이 업무를 겸임하였다.
광무 9년(1905) 11월 17일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간에 체결된 소위 ‘을사보호조약’ 제3조에 의하여 경성에 통감부(統監府)를, 인천ㆍ부산ㆍ진남포ㆍ목포ㆍ마산ㆍ기타 필요한 지역에 이사청(理事廳)을 설치하고 이 협약에 의한 제반 사무를 관장하여 오다가 1906년 6월 법률 제56호 ‘한국에 있어서의 재판사무에 관한 건’이 공포되어 통감부에 법무원(法務院)을 설치하고 법무원 및 이사청으로 하여금 한국의 재판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사청은 원래 공리(公吏)가 행하던 직무를 취급하고 있었는데, 그 관할구역 안에 있어서의 소송사건의 시심(始審: 제1심) 및 비송사건(非訟事件)을 이사관 또는 부이사관이 단독으로 재판하고 그 청(廳)의 검찰사무에 대한 검사의 직무를 집행하게 하였다.
법무원에는 사법사무에 관하여 이사관을 지휘ㆍ감독하는 원장과 사법사무를 관장하는 평정관(評定官), 법무원장의 명을 받아 검찰 및 감옥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검찰관 등이 있다. 여기서는 이사청의 재판에 대한 상소사건을 중심으로 취급하는데, 평정관 3인으로 조직된 부(部)에서 심문ㆍ재판하고 평정관 중 상석의 자를 재판장으로 하였다.
1907년 12월 27일에는 ‘재판소구성법’ (법률 제8호), 동법 시행령(법률 제9호), ‘재판소설치법’(법률 제10호)이 공포되었다. 이것은 대체로 일본을 모방하여 종래의 2심제로 하는 한편, 대심원(京城), 공소원(京城ㆍ平壤ㆍ大邱), 각 지방재판소를 설치하여 이를 법부의 소관으로 하고 종래의 각 재판소를 폐지하였으며, 각급 재판소에는 검사국(檢事局)도 같이 두었다.
1909년 7월 12일에는 한ㆍ일 양 정부의 각서(사법 및 감옥사무의 위탁에 관한 건)에 의하여 한국의 사법권이 일본 정부에 완전히 이양되고, 종래의 법관양성소를 법학교로 개칭하여 한국인 법관을 양성하였다. 그 후 한일 양국 정부간의 각서에 의하여 한국정부의 법부(法府)와 통감부, 법무장관제(法務長官制)를 각각 폐지하는 동시에 통감부 및 이사청관제(理事聽官制)를 개정하여 마침내 사법제도의 일원화를 기하게 되었다. 동년 11월 1일부터 시행된 통감부재판소령(統監府裁判所令)에 의하면 통감부재판소는 통감(統監)에 직속하며 구재판소(區裁判所)ㆍ지방재판소ㆍ공소원(控訴院) 및 고등법원으로 구분하고 검사국을 병설하였다.
융회 4년(1910) 8월 29일 일본의 강점으로 인하여 동년 10월 1일 총독정치가 시작됨에 따라 총독부재판소령을 조선총독부재판소령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었다.
1912년 3월 18일 재판소령(裁判所令)을 개정하여 지방법원ㆍ복심법원(覆審法院) 및 고등법원의 3급 3심제를 채택하고(종전의 區裁判所는 폐지), 지방법원 사문의 일부를 취급하게하기 위하여 지방법원지청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방법원은 민사ㆍ형사에 관한 제1심 재판에 비송사건에 대한 사무를, 복심법원은 지방법원의 재판에 대한공소 및 항고사건을 각각 처리하고, 고등법원은 복심법원의 재판에 대한 상고 및 항소사건을 중심으로 재판하고, 당시 일본 재판소 구성법에 정한 대심원(對審院)의 특별 권한에 속한 직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1948년 5월 4일 과도정부는 과도정부령 제192호로 법원조직법(法源組織法)을 제정ㆍ공포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 군정청(軍政廳) 사법부에서 관장하던 법원업무를 대법원으로 이관하였다. 각급 법원의 관할에 있어서 현재와 비슷하나 특이한 것은 지방법원 합의부(合議部)에서 지방법원 및 동지원 단독판사의 판결과 간이법원의 판결에 대한 공소사건을 취급하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간이법원은 제1심 하급법원으로 경찰서 소재지단위로 설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대신에 치안관(治安官)제도가 창설되었다. 이 치안관제도는 1956년 12월 26일 법률 제49호로 주재판사(駐在判事)제도가 폐지되고 판사로 하여금 지역을 순회케 하는 순회판사(巡廻判事)제도가 새로이 설치됨으로써 자동적으로 폐지되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법치주의이념을 실현하는 근대적 사법제도가 도입된지 100주년이 된 1995년은 뜻 깊은 해로 몇 가지 변모가 있었다. 동년 9월 1일부터 종전의 순회심판소가 없어지고 대신에 시법원 또는 군법원(이하 시ㆍ군법원)이 새로 생겼다. 종래 순회심판소 체제에서는 지방법원 또는 동 지원에서 근무하는 판사가 한 달에 한 두번 순회심판소에 잠시 와서 재판만하고 돌아감으로써 재판의 지연문제가 있었으나 시ㆍ군법원이 생김으로써 전담판사가 지정되어 상주하면서 주1회 재판을 열고 소액사건과 가압류사건도 처리한다. 종래 소액ㆍ화해ㆍ독촉ㆍ조정사건 등의 순회심판소 관할사건에 관하여 관할 지방법원 본원이나 지원도 관할권이 있어서 당사자의 선택으로 제소할 수 있었으나 시ㆍ군법원의 설치로 이에 배타적 토지관할권이 부여되었으며, 종래에 인정되지 않았던 협의이혼의사 확인사건을 처리 할 권한도 관할지원 등과 중첩적 관할권이 부여되었다.
현재 법원의 종류로 대법원ㆍ고등법원ㆍ특허법원(1998년 3월 1일 시행)ㆍ지방법원ㆍ가정법원ㆍ행정법원(1998년 3월 1일 시행) 및 간이법원으로 구분하여 민사ㆍ형사 및 산업재산권소송ㆍ선거소송 기타 일체의 법률적 쟁송(爭訟)을 심판하고 비송사건 및 기타 법률이 정한 바에 의한 사건을 관장키로 하였다. 또 지방법원 및 가정법원의 사무 일부를 처리하기 위하여 그 관할구역 안에 지원과 소년부지원(少年部支院), 시ㆍ군법원(시ㆍ군법원; 종전의 순회심판소를 1995년 9월 1일부터 개편) 및 등기소를 설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法源組織法 제3조).
제1절 개관
일제(日制)의 무조건 항복으로 8ㆍ15광복의 날을 맞이한 지 약 3년만인 1948년에 한국헌정사상 최초의 ‘5ㆍ10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단독선거ㆍ단독정부 반대’라는 구호아래 남북협상에 참가한 상해임시정부계(上海臨時政府系)의 김구(金九)ㆍ김규식(金奎植) 등 민족진영의 일부 인사들에 의하여 거부되고, 또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계열의 방해공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6개 선거구를 제외하고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여기서 선출된 198명의 국회의원들로 제헌국회(制憲國會)가 구성되었다.11)
제헌국회는 그 조직구성12)이 끝나자 대한민국의 법적 기초가 되는 헌법제정작업에 착수하여 1948년 7월 17일 건국헌법(建國憲法)이 공포ㆍ발효되고, 동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선포되었다. 헌법이 제정된 지 40여년 만에 전후 12차례에 걸쳐 개헌안이 제출되고, 9차에 걸친 잦은 개헌이 단행되었는데, 역대 헌법들은 예외없이 권력분립제(權力分立制)를 채택하였다.13)
헌법 제101조 제1항이 “사법권(司法權)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法院)에 속한다”라고 하는 것은, 헌법에 별도의 규정이 없는 한 실질적 의미의 사법에 관한 권한은 원칙으로 법원의 권한에 속한다라고 하는 ‘법원사법(法院司法)의 원칙’을 규정한 것이다. 이 조항은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라고 하는 헌법 제40조 및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首班)으로 하는 정부에 속한다”라고 하는 제66조 제4항과 더불어 현대 헌법에 있어서 권력분립(權力分立)에 관한 규정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사법권의 독립’을 선언한 규정이기도 하다.
사법권의 독립을 위해서 사법을 담당하는 기관인 ‘법원’의 독립과 재판을 담당하는 법관의 독립을 제도적으로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행 헌법도 제101조 제1항에서 입법부와 행정부로부터 법원을 독립[기관의 독립]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102조 제3항에서는 “대법원과 각급 법원의 조직은 법률로 정한다.”[법률에 의한 법원조직]라고 하고, 또 제108조에서는 “대법원은 법률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범위 안에서 소송에 관한 절차, 법원의 내부규율과 사무처리에 관한 규칙을 제정할 수 있다”[법원의 자율권]라고 하여 법원의 독립을 뒷받침하고 있다.
11) 『國會十年誌』(國會事務處,1958, 1~3p)에 의하면, 총유권자 8,132,517명 중 96.4%가 선거인 명부에 등록하고, 전등록자의 95.5%가 투표에 참가하였으며, 그 중 96.3%에 해당하는 투표가 유효투표였다. 그리고 총 입후보자 942명 중 198명이 당선되었다.
소속 정당별 당선자로는 大韓獨立促成國民會 53명,大韓民主黨 29명, 大同靑年團 14명, 民族靑年團 6명, 기타 단체 11명, 그리고 무소속 85명이 있다.
12) 1948년 5월 31일 정식으로 국회가 소집되어 의장에 李承晩, 부의장에 申翼熙와 �東元을 선출하였다.
13) 그러나 권력분립의 정도와 내용은 약간씩 차이가 나서, 건국 헌법은 비교적 행정부 우위의 권력분립제를, 1960년 헌법은 비교적 균형이 유지된 권력분립제를, 1962년에는 다시 행정부 우위 , 1972년 헌법과 1980년 헌법은 행정부의 절대적 우위를 내용으로 하는 권력분립제를 규정하였다.
(權�星,『憲法學原論』,法文社,1988,pp.605~606)
그리고 헌법 제103조에서는 “법원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라고 하여 구체적 사건을 재판함에 있어서 입법ㆍ행정부의 외부기관은 물론 사법부 내에서도 상급법원이나 소속 법원장의 지시나 명령을 받지 않고[외부작용으로부터의 독립]오직 헌법과 법률 그리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만[헌법과 법률 및 양심에의 구속]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법관의 직무상ㆍ재판상ㆍ실질적[물적] 독립’을 보장하고 있고, 제105조에서는 법관의 임기제와 연임제(連任制)를, 제101조 제3항에서는 법률에 의한 법관의 자격을, 제106조 제1항에서는 법관의 신분보장을 각각 규정하여, 법관의 직무상 독립을 뒷받침하기 위한 ‘법관의 신분상[인적] 독립’을 보장하고 있다.
여기서 속초시의 사법의 역사를 보려면, 먼저 사법제도 전반의 변천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중세 이후의 전제군주국가(專制君主國家)에서는 입법ㆍ사법ㆍ행정의 모든 국가권력이 군주 일 개인의 수중에 집중되어, 공정ㆍ타당하여야 할 재판까지도 오히려 왕권의 일부로 간주됨으로써 군주의 관방(官房)에 의한 관방사법(官房司法: Kabinettsjustiz)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관방사법에 의한 자의적인 재판을 통하여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얼마만큼 위협을 받았는가는 각국의 재판사(裁判史)가 입증하여 보여주고 있다.
한말 고종 31년(1894)은 우리나라에서 개화와 변혁이 일어난 해로 당시 법무대신 서광범(徐光範)이 고종에게 사법제도의 근대화 작업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근대적으로 제도화된 사법제도가 나타난 것은 고종 32년 법률 제1호로 재판소구성법(裁判所構成法)이 공포된 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갑오경장(甲午更張: 1894년) 이전의 법제(法制)는 봉건적 절대군주국가로서의 중국 법제를 모방한 것이었다.
이 시대의 사법제도, 즉 민사상의 분쟁해결 및 형벌의 결정이라는 사법작용은 그것이 행정 내지 정치과정의 일부로써 시행되었다. 법관은 행정ㆍ입법 및 사법의 통괄자인 군주의 사용인 내지 보조자로서 일하는 체제였으며 권력분립이나 사법의 독립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따라서 사법도 행정의 편의에 이용된 실정이었지만, 그 시대에 있어서도 재판은 정확하고 공정ㆍ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근본원칙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삼국시대 이전의 상고시대(上古時代) 부족국가들도 천신(天神)에게 제사한 다음 죄인에 대한 형벌을 결정하고 백성의 원통한 일을 판결하며 그 밖에 부족민들의 분쟁의 해결을 부족수장(部族首長)의 전결로써 해결하였으며, 민족 최초국가인 고조선시대에는 범금팔조법(犯禁八條法) 등 범죄와 형벌제도가 있었다.
그 내용은 ① 살인자는 즉시 죽이고, ② 사람을 다치게 하면 곡물로 배상케 하고, ③ 도둑은 그 재물을 몰수하고 그 집의 노예가 되고 여자는 노비가 되게 하고, ④ 소도(蘇塗)를 훼손한 자는 금고(禁錮)에 처하며, ⑤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케 하고, ⑥ 열심히 일하지 않는 자는 부역을 시키며, ⑦ 삿된 음행을 하는 자는 볼기로 다스리고, ⑧ 사기자(詐欺者)는 훈계하여 방면하나 스스로 속죄하면 공표를 면해줘도 민속으로 결혼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로써 백성들은 끝내 도둑질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을 닫는 일이 없었고, 부인은 정신(貞信)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밭ㆍ들ㆍ도읍을 막론하고 음식을 바쳐 제사 올리니, 어질고 겸양하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단군 11세 도해단군(道奚檀君)은 사형제도를 폐지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고구려시대에는 민간 분쟁의 해결과 형벌의 결정은 친국[親鞫: 국왕이 스스로 궁성 내에서 법정을 개정하고 재판하는 것]으로 하거나 중앙 또는 지방관리의 재량에 맡겨졌다. 대무신왕(大武神王) 및 소수림왕(小獸林王)14)은 재판의 신속한 처리를 촉구하는 조직을 제도화한 기록이 있고, 통일신라 때에는 좌우이방부(左右理方部)라는 사법기관(司法機關)을 설치하여 재판사무를 전담케 한 기록이 있으나 그 실상은 다른 행정관도 사법권을 겸장하고 있었다.
14) 고구려가 고대 국가로서의 관료조직을 갖추게 된 것은 대체로 율령정치가 시작된 소수림왕 때였고 평양천도 이후 더욱 정비되었다. 고준환, 『하나되는 한국사』, 범우사, 1992, p.200
고려시대에는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중앙에 형부(刑部)를 설치하여 그 장관인 형부상서(刑部尙書)의 책임 하에 사법사무를 전담케 하고, 지방에 있어서는 도행정관(道行政官)인 감사(監司)와 하급 지방관인 지군사(知郡事: 지금의 군수에 해당한다)ㆍ감무(監務) 등이 있어 군인이나 병역의무자에 대하여서는 병마(兵馬) 또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재판사무를 관장하였다. 그리고 지방관이 처리하던 사법사무를 감독하기 위하여 안렴사(按廉使)를 두어 지방을 순찰케 하였으며, 또 공무원의 비위사실을 감찰ㆍ규탄하는 기관으로 중앙에 어사대(御史臺)를 두었다가 후에 금오대(金吾臺)ㆍ감찰부(監察部)ㆍ사헌부(司憲府) 등으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
재판절차에 있어서도 삼복(三覆)이라 하여 오늘날의 삼심제(三審制)와 비슷한 제도를 채택하고 상급관청에 대한 항소를 허락하였고 예종 원년(1106)에는 고문금지의 준칙이 발표되는 등 사법제도의 현저한 발달을 보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아직 근대적 권력분립 사상이 발달되지 않았으므로 사법권의 독립원칙은 서 있지 않았으며 사법기관은 전제군주의 보좌기관 내지 간쟁기관(諫爭機關)이라는 체제하에서 움직였다. 1심(審) 겸 최고심을 국왕이 관장하고 국왕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궁중에 수시로 친국청(親鞫廳)을 설치하여 국왕 스스로 대신들을 거느리고 재판하였다. 이 때의 중앙사법기관으로는 의금부ㆍ형조ㆍ한성부가 있었는데, 이를 삼법사(三法司)라고 하였다. 또한 관리의 비위를 감찰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하고 있는 기관으로는 사헌부가 있었다.
조선초기에 설치된 사헌부는 관헌(官憲)의 기강감찰을 담당하는 외에 그릇된 풍속을 교정하며 억울한 백성의 사정을 밝히고 외람된 행위를 금지케 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삼았다. 장관은 종이품으로 대사헌(大司憲)이라고 불렀고 그 밑에 집의(執義)ㆍ장령(掌令)ㆍ지평(持平)ㆍ감찰(監察) 등의 관원을 두었다. 의금부는 국왕의 명령에 의해서만 활동할 수 있었던 특수범죄를 처리하는 기관이며,15) 그 우두머리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使)라고 불렀으며, 그의 직위는 종일품이었다. 그 밑에는 지의금부사(知義禁府使)ㆍ동지의부사(同知義府使)ㆍ의금부도사(義禁府都使) 등이 있었는데, 주로 왕족이나 관리의 범죄 및 반역죄에 해당하는 죄를 재판하였다. 의금부는 뒤에 의금사(義禁司)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법무아문(法務衙門) 권설재판소(權設裁判所)로 변경되었고 그후 고등재판소, 평리원(平理院) 등의 전신이 되었다. 중앙 6조 중의 하나인 형조는 지금의 법무행정과 일부 재판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여지며 후에 법무아문으로 바뀌었다가 법부(法部)로 변경되었다. 형조의 장관은 형조판서라고 불렀고 그 예하에 상복사(詳覆司: 중죄에 대한 覆審擔當)ㆍ고율사(考律司: 법령조사담당)ㆍ장금사(掌禁司: 감옥과 범죄수사담당)ㆍ장예사(掌隸司: 노예와 포로에 관한 사항 담당)의 4사를 두었고 그 밖에 율학청(律學廳)ㆍ전옥서(典獄署)ㆍ좌우포도청(左右捕盜廳: 후에 병조 소속)을 관장하였다.
한성부는 수도행정 및 사법을 담당하여 전국의 전택(田宅)에 관한 소송업무 등을 관장하였으며, 장관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이라고 불렀다. 한성부의 예하에는 5부를 두어 경미한 사건의 재판사무도 관장하게 하였다. 그 외에도 직수아문(直囚衙門)이라 하여 인신구금의 권한이 부여되어 있던 관부(官府)로서 병조(兵曹)ㆍ승정원(承政院)ㆍ종부사(宗簿司)ㆍ비변사(備邊司)ㆍ포도청(捕盜廳) 등에서도 경미한 사건에 대한 처벌의 권한도 가졌다.
15) 왕족의 범죄, 관원으로서 관기를 문란하게 한 자, 국사범, 모역죄 및 반역죄의 대옥사건, 사헌부가 탄핵한 사건, 綱常(三綱五倫)에 관한 범죄사건 등을 관장하였고, 후일에는 양반의 자손까지도 治罪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서울地方檢察廳史』, 서울지방검찰청, 1985, p.16
지방사법기관으로는 관찰사ㆍ수령ㆍ암행어사 등을 들 수 있다. 관찰사는 전국을 8도로 나누어 각 도의 행정ㆍ사법을 통할하고 유배형 이하의 형사사건을 초심으로 직접 재판하고 민사사건에서 관하 수령의 재판에 대한 복심을 행하였다. 관찰사 관하 부윤ㆍ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ㆍ목사(牧使)ㆍ도호부사(都護府使)ㆍ유수(留守)ㆍ군수(郡守)ㆍ현령(縣令)ㆍ현감(縣監)을 통털어 수령이라 하는데, 이는 일반행정 이외에 태형(笞刑) 이하의 형사사건과 일반 민사사건의 초심을 행하였다. 암행어사는 국왕이 임시 파견하는 비밀사신으로 수령의 재판을 재심하는 부정기 순회재판관의 역할도 하였다.
1894년 청ㆍ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자 일본은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겠다는 미명하에 당시 일본 공사 오도리(大鳥圭介)로 하여금 한국의 개화당을 움직여 대원군을 받들고 민씨(閔氏)일파의 사대당을 몰아낸 뒤 김홍집(金弘集)을 수반으로 하는 개신내각(改新內閣)을 조직하여 제반제도를 개혁하였다. 이것을 바로 고종 31년(1894)에 일어난 갑오경장이라 한다. 이 때에 김홍집 내각은 장기간 적폐되었던 서정(庶政)을 혁신한다는 명목 하에 관제를 개정함에 있어 형조를 법부(法部)로 개칭하고 법부 관장 하에 선진국의 사법제도를 모방하여 ‘재판소구성법’(裁判所構成法: 1895년 3월 25일 법률 제1호)을 제정ㆍ공포하여 법부 산하에 지방재판소, 한성 및 인천 기타 개항장재판소ㆍ순회재판소ㆍ고등재판소ㆍ특별법원 등 5종의 재판소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직원으로는 판사ㆍ검사ㆍ서기ㆍ정리를 두도록 하고 고등재판소와 특별법원에는 따로 재판장을 두고, 판사ㆍ검사는 일정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 자를 임명하기로 하였다.
지방재판소와 한성 및 인천 기타 개항장재판소는 일반 형사사건을 재판함을 원칙으로 하되 2인 이상의 판사를 두는 경우에는 단석(單席) 또는 합석으로 재판할 수 있으며 합석의 경우에는 수반판사(首班判事)가 형을 선고하게 되어 있었다. 한성 및 인천 기타 개항장재판소는 일반 형사사건 외에도 외국인으로서 본 국민에 대하여 범한 형사사건까지 처리하게 하였다. 순회재판소는 법무대신(法務大臣)이 지정한 장소에서 매년 3~9월까지의 기간 중 그 지역 안의 지방재판소 판결에 대하여 불복하는 사건을 단독판사로 하여금 재판하게 하였다. 고등재판소는 법부에서 임시 개정하여 한성 및 인천 기타 개항장재판소의 판결에 대하여 불복하는 상소사건을 합의재판하며, 특별법원은 왕족의 범죄에 관한 사건을 심판하는 제도였다. 법문(法文)으로는 이처럼 많은 재판소가 설치되었으나, 실제로 개설된 것은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와 고등재판소뿐이었고 지방재판소는 각 도의 감영(監營) 등에, 개항장재판소는 감리서(監理署)에 합설(合設)되었으며 관찰사ㆍ목사ㆍ감리(監理) 등이 업무를 겸임하였다.
광무 9년(1905) 11월 17일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간에 체결된 소위 ‘을사보호조약’ 제3조에 의하여 경성에 통감부(統監府)를, 인천ㆍ부산ㆍ진남포ㆍ목포ㆍ마산ㆍ기타 필요한 지역에 이사청(理事廳)을 설치하고 이 협약에 의한 제반 사무를 관장하여 오다가 1906년 6월 법률 제56호 ‘한국에 있어서의 재판사무에 관한 건’이 공포되어 통감부에 법무원(法務院)을 설치하고 법무원 및 이사청으로 하여금 한국의 재판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사청은 원래 공리(公吏)가 행하던 직무를 취급하고 있었는데, 그 관할구역 안에 있어서의 소송사건의 시심(始審: 제1심) 및 비송사건(非訟事件)을 이사관 또는 부이사관이 단독으로 재판하고 그 청(廳)의 검찰사무에 대한 검사의 직무를 집행하게 하였다.
법무원에는 사법사무에 관하여 이사관을 지휘ㆍ감독하는 원장과 사법사무를 관장하는 평정관(評定官), 법무원장의 명을 받아 검찰 및 감옥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검찰관 등이 있다. 여기서는 이사청의 재판에 대한 상소사건을 중심으로 취급하는데, 평정관 3인으로 조직된 부(部)에서 심문ㆍ재판하고 평정관 중 상석의 자를 재판장으로 하였다.
1907년 12월 27일에는 ‘재판소구성법’ (법률 제8호), 동법 시행령(법률 제9호), ‘재판소설치법’(법률 제10호)이 공포되었다. 이것은 대체로 일본을 모방하여 종래의 2심제로 하는 한편, 대심원(京城), 공소원(京城ㆍ平壤ㆍ大邱), 각 지방재판소를 설치하여 이를 법부의 소관으로 하고 종래의 각 재판소를 폐지하였으며, 각급 재판소에는 검사국(檢事局)도 같이 두었다.
1909년 7월 12일에는 한ㆍ일 양 정부의 각서(사법 및 감옥사무의 위탁에 관한 건)에 의하여 한국의 사법권이 일본 정부에 완전히 이양되고, 종래의 법관양성소를 법학교로 개칭하여 한국인 법관을 양성하였다. 그 후 한일 양국 정부간의 각서에 의하여 한국정부의 법부(法府)와 통감부, 법무장관제(法務長官制)를 각각 폐지하는 동시에 통감부 및 이사청관제(理事聽官制)를 개정하여 마침내 사법제도의 일원화를 기하게 되었다. 동년 11월 1일부터 시행된 통감부재판소령(統監府裁判所令)에 의하면 통감부재판소는 통감(統監)에 직속하며 구재판소(區裁判所)ㆍ지방재판소ㆍ공소원(控訴院) 및 고등법원으로 구분하고 검사국을 병설하였다.
융회 4년(1910) 8월 29일 일본의 강점으로 인하여 동년 10월 1일 총독정치가 시작됨에 따라 총독부재판소령을 조선총독부재판소령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었다.
1912년 3월 18일 재판소령(裁判所令)을 개정하여 지방법원ㆍ복심법원(覆審法院) 및 고등법원의 3급 3심제를 채택하고(종전의 區裁判所는 폐지), 지방법원 사문의 일부를 취급하게하기 위하여 지방법원지청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방법원은 민사ㆍ형사에 관한 제1심 재판에 비송사건에 대한 사무를, 복심법원은 지방법원의 재판에 대한공소 및 항고사건을 각각 처리하고, 고등법원은 복심법원의 재판에 대한 상고 및 항소사건을 중심으로 재판하고, 당시 일본 재판소 구성법에 정한 대심원(對審院)의 특별 권한에 속한 직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1948년 5월 4일 과도정부는 과도정부령 제192호로 법원조직법(法源組織法)을 제정ㆍ공포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 군정청(軍政廳) 사법부에서 관장하던 법원업무를 대법원으로 이관하였다. 각급 법원의 관할에 있어서 현재와 비슷하나 특이한 것은 지방법원 합의부(合議部)에서 지방법원 및 동지원 단독판사의 판결과 간이법원의 판결에 대한 공소사건을 취급하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간이법원은 제1심 하급법원으로 경찰서 소재지단위로 설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대신에 치안관(治安官)제도가 창설되었다. 이 치안관제도는 1956년 12월 26일 법률 제49호로 주재판사(駐在判事)제도가 폐지되고 판사로 하여금 지역을 순회케 하는 순회판사(巡廻判事)제도가 새로이 설치됨으로써 자동적으로 폐지되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법치주의이념을 실현하는 근대적 사법제도가 도입된지 100주년이 된 1995년은 뜻 깊은 해로 몇 가지 변모가 있었다. 동년 9월 1일부터 종전의 순회심판소가 없어지고 대신에 시법원 또는 군법원(이하 시ㆍ군법원)이 새로 생겼다. 종래 순회심판소 체제에서는 지방법원 또는 동 지원에서 근무하는 판사가 한 달에 한 두번 순회심판소에 잠시 와서 재판만하고 돌아감으로써 재판의 지연문제가 있었으나 시ㆍ군법원이 생김으로써 전담판사가 지정되어 상주하면서 주1회 재판을 열고 소액사건과 가압류사건도 처리한다. 종래 소액ㆍ화해ㆍ독촉ㆍ조정사건 등의 순회심판소 관할사건에 관하여 관할 지방법원 본원이나 지원도 관할권이 있어서 당사자의 선택으로 제소할 수 있었으나 시ㆍ군법원의 설치로 이에 배타적 토지관할권이 부여되었으며, 종래에 인정되지 않았던 협의이혼의사 확인사건을 처리 할 권한도 관할지원 등과 중첩적 관할권이 부여되었다.
현재 법원의 종류로 대법원ㆍ고등법원ㆍ특허법원(1998년 3월 1일 시행)ㆍ지방법원ㆍ가정법원ㆍ행정법원(1998년 3월 1일 시행) 및 간이법원으로 구분하여 민사ㆍ형사 및 산업재산권소송ㆍ선거소송 기타 일체의 법률적 쟁송(爭訟)을 심판하고 비송사건 및 기타 법률이 정한 바에 의한 사건을 관장키로 하였다. 또 지방법원 및 가정법원의 사무 일부를 처리하기 위하여 그 관할구역 안에 지원과 소년부지원(少年部支院), 시ㆍ군법원(시ㆍ군법원; 종전의 순회심판소를 1995년 9월 1일부터 개편) 및 등기소를 설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法源組織法 제3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