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나라의 체육 72)
원시시대의 체육활동은 사냥과 채집 등 인간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맹수 또는 다른 종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생존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시시대의 체육은 의도적인 교육활동이 아니라 생존으로서의 수단이 곧 목적인 활동이었다.
부족국가 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 인간은 농경생활을 하며 부족을 형성하여 정착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자신과 가족 나아가 부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활쏘기, 창 다루기 등의 무예를 익히는 체육활동을 활발히 하게 되었으며, 농사를 위해 제례의식을 갖추게 되어 노래와 춤, 그리고 민속놀이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삼국의 세력 다툼으로 인하여 무술을 훈련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신라에서는 근랑(近廊)이란 사무소를 설치하여 화랑을 양성하였다. 화랑들은 명산대천(名山大川)을 관람하며, 가무와 무예를 익히며, 학문에도 정진하여, 지(知), 덕(德), 체(體)를 겸비한 화랑도 정신에 입각한 교육을 받았다. 이 시대의 귀족들은 훌륭한 무사가 됨을 강요받았으며, 일반 국민들도 군사의 의무를 이행해야 했다. 이와 같은 시대 상황으로 인하여 유술(柔術), 궁술(弓術), 검술(劍術), 경마(競馬), 축구(蹴球)와 같은 체육 활동을 하게 되었으며, 씨름, 수영, 줄다리기, 석전(石戰), 썰매타기, 연날리기, 그네뛰기, 널뛰기, 쌍육(주사위 놀이), 투호와 같은 민속놀이가 성행하였다73).
신라의 화랑도 정신이 삼국통일의 기초가 되어 나라를 통치하는 기반이 되었으나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면서, 불교가 전래되고 학문과 예술이 발달하게 됨으로써 무예활동이 쇠퇴하여 유희나 오락적 활동이 활발해지게 되었다.
고려시대 초기에는 북방민족과의 잦은 마찰로 인하여 무예를 중히 여기게 되었으나, 중기에 접어들면서, ‘숭문정책(崇文政策)’으로 무술활동이 쇠퇴함에 따라 모든 신체적 활동에 유희와 경기적 요소를 가미한 삼국시대의 민속놀이인 격구, 수희, 수박 등이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일반 국민들 사이에 건강관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계층에 따른 체육 활동이 분화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사상’으로 인하여 무예가 쇠퇴하고 군사훈련을 과목으로 실시하였으며, ‘문존무비(文尊武卑)’ 사상으로 무예는 천민이 담당하는 것으로 전락하였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대표적인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의 그림을 보면 등장인물들의 옷차림 대부분이 서민들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서민층을 중심으로 널뛰기, 그네, 줄다리기, 차전놀이 등의 민속놀이가 성행하였다. 이에 반해, 양반층에서는 격구, 추호, 쌍륙 등이 행해졌으며, 퇴계 이황의 『활인심방』에 나와 있듯이 실내에서 ‘의료체조’ 행위가 성행하였다.
갑오개혁 이후 개화기인 1880년에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가 레크리에이션 과목을 개설하여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체육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영국인 선교사 허치슨(Huchison)에 의해 최초의 운동회인 ‘화류회’가 열리기도 하였으며, 주로 ‘YMCA’를 통하여 축구, 야구, 농구, 테니스 등의 서양스포츠의 도입가 도입되어 체육 보급에 기여하였다. 1906년에는 ‘보통학교령’이 제정되어 체조를 정규과목으로 선정하여 매주 체조 수업시간을 갖게 되어 신체의 균등 발달을 꾀하고자 하였으며, 아동의 개성과 취미를 고려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 후 ‘대한체육구락부’와 같은 각종 체육 단체가 출현하여 민중 체육활동의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72) (http://aloh.x-y.net)「우리나라 체육사」참조.
73)『 속초시지』, 1991,p.933

일제시대에는 외형적으로 그 양이 증대되었으나 실제적으로는 군사적 훈련으로 전개되었다. 1920년 온 국민들의 여망과 언론기관의 적극적인 지지로 ‘조선체육회’가 창설되어, 그 해 11월에 배재고보(培材高普) 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 야구대회를 거행하게 되었다. ‘조선체육회’ 출발초기에는 오늘 날과 같은 종합대회의 형태를 갖추기 보다는 단일 종목별 경기대회를 형편 닿는 대로 개최하며 체육활동의 폭을 넓혀나갔다. 1925년 경성운동장(현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조선신궁경기대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경기대회이다. 그러나 민족의 종합체육대회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1934년 조선체육회 창립 15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전조선 종합경기대회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때 거행된 종목은 축구, 야구, 정구, 농구, 육상 등 5종목이었다. 그 이듬해에는 유도, 씨름, 검도, 역기가 추가되고, 1936년에는 빙상, 격투, 탁구가, 1937년에는 배구가 추가되는 등 대회규모가 점차적으로 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종합경기대회를 통해 스포츠 본래의 가치에서 벗어나 민족운동과 연계되었다. 그 대표적 사건이 ‘일장기 말소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냈는데 동아일보에서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신문에 내보내 그 결과 동아일보는 폐간이 되었고,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두려워 한 일본은 체육활동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938년에는 일제의 탄압과 강압에 따라 일본인에 의해 설립된 국민정신총력연맹조선지부에 통합되어 체육의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후 조선체육협회로 개칭된 조선체육회는 또다시 조선체육진흥회로 개칭되어 전투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전투운동 외에는 일체의 체육활동이 금지되었다.
광복이후 ‘조선체육회’는 ‘대한체육회(KOC)’라 개칭되었으며, 1947년 이원순 대표가 IOC에 정식으로 가입하여, 드디어 1948년 14회 런던올림픽에 최초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7종목 67명의 선수단이 출전하게 되었다. 6.25 전쟁 중에도 군의 협조로 광주에서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하는 등 꾸준한 발전을 하게 되었다.
1976년 제21회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양정모 선수가 레슬링 그레꼬로망 종목에서 첫 금메달 따내는 쾌거를 이뤘으며,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을 개최하여, 금 14개를 따내 종합전적 세계 4위의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뤘다. 1992년 제25회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는 마라톤에서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 따는 등 스포츠 강국으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1997년에는 부산에서 제2회 동아시아경기 대회를 개최하였으며, 2002년에는 부산아시아경기 개최하였고, 일본과 함께 월드컵을 공동으로 개최하여 4강에 오르는 등 세계인들의 마음속에 대한민국의 위상을 각인시키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1. 우리나라의 체육 72)
원시시대의 체육활동은 사냥과 채집 등 인간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맹수 또는 다른 종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생존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시시대의 체육은 의도적인 교육활동이 아니라 생존으로서의 수단이 곧 목적인 활동이었다.
부족국가 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 인간은 농경생활을 하며 부족을 형성하여 정착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자신과 가족 나아가 부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활쏘기, 창 다루기 등의 무예를 익히는 체육활동을 활발히 하게 되었으며, 농사를 위해 제례의식을 갖추게 되어 노래와 춤, 그리고 민속놀이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삼국의 세력 다툼으로 인하여 무술을 훈련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신라에서는 근랑(近廊)이란 사무소를 설치하여 화랑을 양성하였다. 화랑들은 명산대천(名山大川)을 관람하며, 가무와 무예를 익히며, 학문에도 정진하여, 지(知), 덕(德), 체(體)를 겸비한 화랑도 정신에 입각한 교육을 받았다. 이 시대의 귀족들은 훌륭한 무사가 됨을 강요받았으며, 일반 국민들도 군사의 의무를 이행해야 했다. 이와 같은 시대 상황으로 인하여 유술(柔術), 궁술(弓術), 검술(劍術), 경마(競馬), 축구(蹴球)와 같은 체육 활동을 하게 되었으며, 씨름, 수영, 줄다리기, 석전(石戰), 썰매타기, 연날리기, 그네뛰기, 널뛰기, 쌍육(주사위 놀이), 투호와 같은 민속놀이가 성행하였다73).
신라의 화랑도 정신이 삼국통일의 기초가 되어 나라를 통치하는 기반이 되었으나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면서, 불교가 전래되고 학문과 예술이 발달하게 됨으로써 무예활동이 쇠퇴하여 유희나 오락적 활동이 활발해지게 되었다.
고려시대 초기에는 북방민족과의 잦은 마찰로 인하여 무예를 중히 여기게 되었으나, 중기에 접어들면서, ‘숭문정책(崇文政策)’으로 무술활동이 쇠퇴함에 따라 모든 신체적 활동에 유희와 경기적 요소를 가미한 삼국시대의 민속놀이인 격구, 수희, 수박 등이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일반 국민들 사이에 건강관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계층에 따른 체육 활동이 분화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사상’으로 인하여 무예가 쇠퇴하고 군사훈련을 과목으로 실시하였으며, ‘문존무비(文尊武卑)’ 사상으로 무예는 천민이 담당하는 것으로 전락하였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대표적인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의 그림을 보면 등장인물들의 옷차림 대부분이 서민들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서민층을 중심으로 널뛰기, 그네, 줄다리기, 차전놀이 등의 민속놀이가 성행하였다. 이에 반해, 양반층에서는 격구, 추호, 쌍륙 등이 행해졌으며, 퇴계 이황의 『활인심방』에 나와 있듯이 실내에서 ‘의료체조’ 행위가 성행하였다.
갑오개혁 이후 개화기인 1880년에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가 레크리에이션 과목을 개설하여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체육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영국인 선교사 허치슨(Huchison)에 의해 최초의 운동회인 ‘화류회’가 열리기도 하였으며, 주로 ‘YMCA’를 통하여 축구, 야구, 농구, 테니스 등의 서양스포츠의 도입가 도입되어 체육 보급에 기여하였다. 1906년에는 ‘보통학교령’이 제정되어 체조를 정규과목으로 선정하여 매주 체조 수업시간을 갖게 되어 신체의 균등 발달을 꾀하고자 하였으며, 아동의 개성과 취미를 고려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 후 ‘대한체육구락부’와 같은 각종 체육 단체가 출현하여 민중 체육활동의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72) (http://aloh.x-y.net)「우리나라 체육사」참조.
73)『 속초시지』, 1991,p.933
일제시대에는 외형적으로 그 양이 증대되었으나 실제적으로는 군사적 훈련으로 전개되었다. 1920년 온 국민들의 여망과 언론기관의 적극적인 지지로 ‘조선체육회’가 창설되어, 그 해 11월에 배재고보(培材高普) 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 야구대회를 거행하게 되었다. ‘조선체육회’ 출발초기에는 오늘 날과 같은 종합대회의 형태를 갖추기 보다는 단일 종목별 경기대회를 형편 닿는 대로 개최하며 체육활동의 폭을 넓혀나갔다. 1925년 경성운동장(현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조선신궁경기대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경기대회이다. 그러나 민족의 종합체육대회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1934년 조선체육회 창립 15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전조선 종합경기대회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때 거행된 종목은 축구, 야구, 정구, 농구, 육상 등 5종목이었다. 그 이듬해에는 유도, 씨름, 검도, 역기가 추가되고, 1936년에는 빙상, 격투, 탁구가, 1937년에는 배구가 추가되는 등 대회규모가 점차적으로 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종합경기대회를 통해 스포츠 본래의 가치에서 벗어나 민족운동과 연계되었다. 그 대표적 사건이 ‘일장기 말소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냈는데 동아일보에서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신문에 내보내 그 결과 동아일보는 폐간이 되었고,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두려워 한 일본은 체육활동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938년에는 일제의 탄압과 강압에 따라 일본인에 의해 설립된 국민정신총력연맹조선지부에 통합되어 체육의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후 조선체육협회로 개칭된 조선체육회는 또다시 조선체육진흥회로 개칭되어 전투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전투운동 외에는 일체의 체육활동이 금지되었다.
광복이후 ‘조선체육회’는 ‘대한체육회(KOC)’라 개칭되었으며, 1947년 이원순 대표가 IOC에 정식으로 가입하여, 드디어 1948년 14회 런던올림픽에 최초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7종목 67명의 선수단이 출전하게 되었다. 6.25 전쟁 중에도 군의 협조로 광주에서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하는 등 꾸준한 발전을 하게 되었다.
1976년 제21회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양정모 선수가 레슬링 그레꼬로망 종목에서 첫 금메달 따내는 쾌거를 이뤘으며,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을 개최하여, 금 14개를 따내 종합전적 세계 4위의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뤘다. 1992년 제25회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는 마라톤에서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 따는 등 스포츠 강국으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1997년에는 부산에서 제2회 동아시아경기 대회를 개최하였으며, 2002년에는 부산아시아경기 개최하였고, 일본과 함께 월드컵을 공동으로 개최하여 4강에 오르는 등 세계인들의 마음속에 대한민국의 위상을 각인시키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