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소야팔경(所野八景)
속초에 고을 소자, 들 야자 소야팔경이 나오는데, 그러면 지금 현재 이쪽가면은 논산과 노학동 사이에 쏙 들어 가면은 골이 소야평야입니다. 소야평야가 되고 지금 청초호로 들어오는 내가 있는데요, 그기 저 달마봉에서 발원됩니다.
달마봉에서 발원되가 그 골짜기 물을 합쳐 갖고 내려 와서 이 청초호에 들어오는 건데, 이거를 소야천이라고 합니다. 소야천에 소야팔경이 있는데 지금, 현재 뭐가 있나 하면은 논산조양(論山朝陽), 그래서 지금 현재 조양동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그기 하나의 소야팔경에서 따온 하나의 조양입니다. 그럼 왜 그 논산조양이라고 했느냐. 논산이 아주 지대(地帶)가 낮습니다. 낮는데 아침 해가 뜨면은 제일 먼저 햇빛이 비치는 곳이 조양동입니다.
그래서 논산조양이라고 하고 그 다음 이 온정(溫井)조하 그래니까 이쪽에 저 온천지대가 있습니다. 온천지대가 있는데 이 온정(溫井)에 김이 납니다. 아침에 인제 안개 구름같이 쫙 깔려 있는 그것이 하나의 경이 됩니다. 산은 우에 솟아 있고 산 중허리를 쫙 구름이 감겨가 있는 것같이 그렇게 해서 온정조하(溫井朝霞).
그 다음에 하나는 노동명월(蘆洞明月), 노동이라 하면은 갈골, 노학동 갈골에서 이걸 보면 저녁에 달밤에 갈밭에서 보면 경이 또 하나의 좋은 경이 됩니다.
그 다음 저 위에 올라 가면은 지금에 배목리라 그러지요. 배목리 그러니까 이동백설(梨洞白雪). 거는 배나무밭이 많아서 말이죠. 봄에 꽃이 확피어 가지고 꽃이 떨어질 때 꼭 눈이 와서 말이죠 설경같은 이러한 경이 있었다. 이래서 이동백설.
그 다음이 청대화병(靑垈畵屛)이라 하죠. 그 다음에 이쪽에 옛날에는 주교(舟橋) 지금도 청호동을 건너 가는데 배가 있었죠. 저걸 배다리, 그걸 갖다가 주교, 주교야화(舟橋夜火), 그러니까 저녁으로 불을 밝혀가지고 배다리를 왔다 갔다 하면서 하는 기 주교야화다.
그 다음에 여기 청초호도 그 때 물이 맑으니까 청초마경(靑草磨鏡). 그 다음에 하나는 마지막에 노도귀범(鷺島歸帆). 노도귀범이란 저 앞에 보이는 섬입니다. 저걸 갖다가 우리가 새섬이라고 하는데 갈매기 노(鷺)자를 씁니다. 우리가 청구도 지도에서 보면 명칭 나오는 것이 갈매기 노잡니다. 노돕니다. 갈매기도 새는 새니까 새섬이라 이렇게 합니다.
노도귀범, 그러니까 지금의 풍경을 느낄 수 있느냐 하면은 조양동 해수욕장에서 말이죠, 이렇게 저 노도를 중심으로 해 가지고 이쪽에 저 영금정(靈琴亭)하고 그 사이에서 배가 지나갈 때 보면은 하나의 경을 이룹니다. 완전한 경을 이룹니다. 그래서 이 노도귀범은 항구를 들어오는 과정을 말합니다.
<장헌영, 남·54, 중앙동, 1981. 4. 27>
52. 양폭과 음폭
설악에는 양폭이 있고 음폭이라는 게 있는데요. 양폭이라고 하는 것은 그 어느 분들 대부분 양폭이라고, 두 개가 떨어져서 똑같이 떨어져서 양폭인 줄 알고 하는데, 그게 그래. 인제 대청봉이라는데 인제 양폭이라고 하는 데가 있는데, 양폭이라는 데는 폭이 한 25m 밖에 안 돼요, 길이가.
이 폭이야 뭐 얼마 안되고 한 2m정도 되고 길이가 25m정도 되는데, 거기서부텀 계곡이 두 갈래가 생기는데, 그래 인제 우측 계곡에 양폭이 있고, 좌측 계곡에 음폭이 있어요.
그래 인제 우측 계곡에는 양폭에서 한 50m 올라 가면 천당폭포, 그 천불동 계곡에 인제 마지막 상간 폭포라 해서 하늘 천(天)자, 무리 당(黨)자 해서 천당폭포래는 폭포가 하나 있고, 천당폭포 위로 조그만 무명폭이 하나 있는데 좋지도 못한 폭포가 뭐 하나 있고, 그래서 인제 양폭에 인제 계곡으로 올라 가면 양쪽으로 쭈욱 올라 가면 죽음의 계곡이라고 하는 계곡이 있어요.
죽음의 계곡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와서 죽음의 계곡이라고 불리었지 그전에는 그 백미폭, 건폭. 그 비가 와서 물이 흘러야 폭포가 흐르고, 말라 있다. 그래 마를 건(乾)자, 백미터 폭포. 백미터나 길이가 되는 폭포다. 그것이 비가 오면 물이 많아서, 폭포가 좋으나 물이 없고 가물었을 때는 말라 있다. 그래 건폭(乾瀑)이라고 불리고 백미폭이라고도 불리었어요.
그리고 음폭이라고 하는 데는 양폭에 그 두 갈래로 계곡이 있는데, 그 좌측 계곡으로 올라 가면 그게 음폭인데, 음폭이라고 하는 것은 양폭에서 한 200m 올라 가면 그게 음폭인데. 그게 좀 올라 가기가 바우절벽이래서 올라 가기가 좀 험상 궂은데 거기는 그 여자의 음모냥 아주 흡사 그 여자의 음처럼 생겼다.
그래서 거 음폭이라고 이름을 칭호를 붙이고, 그래 음폭, 음폭이 있으니 또 양폭이 있어야지, 남자가 있어야지, 여자가 있어야 된다. 그래 음양이라는 뜻에 한해서 양폭이니 음폭이라고 불리어 오고 있습니다.
<유만석, 남·50, 설악동, 1981. 4. 18>
53. 계조암과 송강 정철
계조암 얘기가 인제 그기 유명한 얘긴데, 계조암은 누가 창건했냐 하믄, 시기가 자장율사의 제자, 잘하는 사람은 도제를 놔요, 길도(道), 아우제(弟), 도사란 이말이요. 자장율사의 제자라 안하구 도제라 하지요.
자장율사가 가구 나서 두운조사가 계조암을 창건했지요. 창건핸 지가 1,200여년이 됐어요. 자장율사는 그 위에 분이니까. 들어와 처음 들어와서 향성사만 짓구.
두운조사가 계조암을 창건하는데 계조암 특징이 뭐냐하니까 계조암에는 사람이 죽어 본 적이 없어요. 그 절안에서 사람이 앓아서 죽을 무렵이 되면 자연히 그 사람이 저절로 나가게 되는게 그게 특징이구.
계조암은 남자바우 여자바우가 있어요. 계조암에 바위가 이렇게 있는데 여자바우여. 이렇게 이 바위 뒤로 문으로 들어가는 남쪽에 이렇게 쫙 벌리고 있지 그기 수문바우여. 근데 남자바우가 어디 있냐믄 옛날엔 흔들바우가 둘이라고, 둘인데 흔들바우 우짝에 전나무가 하나가 있지. 고 밑에 뾰족하게 나온 게 그기 남자바우가 그 위에 있었는데 송강 정철이가 그걸 말짱 계조암을 파산을 맨들어야 해겠어서, 그 왜 파산을 맨들을라 했냐면 이 명산을 그냥 두면 인물영웅이 나서 인제 그러니까 여느 사람들은 일본사람들이 와서 그랬다구, 아무것 두 모르는 사람이 그러지 용바우 묻었다구.
그렇지만 나라에서 아마 이태조가 들어선 이후에 명승지를 찾아다 그래 인제 정철이가 아주 지리박사거든. 지리박사니까 좋은 데 돌아다녀도 계조암만큼 좋은 데가 없거든.
계조암은 앞의 흔들바우가 소가 동쪽으로 누웠는데 입이 다 있구 눈이 다 있어. 그게 흔들바위가 그 소뿔인데, 계조암으로 들어가서 저짝으로 나가면 변소깐 쪽으로 가서 터 새로 딱은, 거기서 그 바우를 보면 쇠꼬장지가 뚝 끊어졌어. 그거 쇠꽁지가 뚝 끊어 자빠졌어. 소꽁지를 끊었어. 소 응덩이에다 두 자나 되게 징으로 많이 팠어요.
핑 둘레 징으로 쪼쿠는 하여간 정철이란 사람이 영웅이여. 어딜 쪼았는지 엿장사 엿깨듯이 단번에 쫙 깨서 나가 떨어졌어. 그건 누구 거기 다 보면 그냥봐서는 아무 것도 모르지, 그걸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거든. 아직 징자리가 남아 있으니까. 쇠꽁지를 끊구, 쇠뿔을 빼구 그랬어요.
계조암 전체 바우는 목탁바우라 부르지. 목탁바운데, 인제 중이 이상 더 부지런한 사람이 없거든, 중이 새벽에 잠을 자면 목탁바우가 운다는 거지, “딱딱”하고 중을 깨운다는 거지.
<박일호, 남·78, 노학동 2/5, 1992. 4. 5>
54. 영랑호에서 다시 만난 친구
어느 때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 아득한 옛날 일이라 합니다. 한 동리에 그 다정한 두 친구가 서로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 우연히 이별을 하게 되었다 합니다. 다정히 지내던 그 친구와 갑자기 이별을 하게 된 것이 서러워서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 의복을 적셨지요. 적시면서 이별하고 통 그 소식을 모르고 한 10년이 지나도록 서로 종무소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에, 하루는 이별하던 그때 그곳에 당시 한 구절이 있었는데 그 구절이 그때에는 청운에 돌아갈 것이며 나는 청유산을 바라보고 돌아간다 라고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그 친구중의 한 사람의 이름은 만수 만취 오옥령이라는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서로 헤어진 지 10년이 지난 그 어느 날 오옥령은 관동당력이 되어 해상을 순회할 제에 10년 전에 이별했던 친구를 영랑호에서 작은 배를 타고서 즐기고 있는 것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래서 그때 그 오공이 말하기를,
“군은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가?”
하고 물은즉 나는 미시령 아래 화엄사 동굴에서, 동굴에서 살고 있었다고 하고 또는 그 회령군에도 있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이 하루는 그곳을 한 번 찾아서 친구가 말하던 굴에 들어가 본 즉은 일월이 명랑하고 주택이 화려하며 또 춤추는 아이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오공은 참으로 가여히 여겨서 다시 그 친구를 보고,
“군은 어떻게 하여 이곳을 알고 찾아왔는가?”
하고 물어본즉,
“이런 곳이 수 십여 처가 있다고 말하므로 그 후 재차 찾아갔으나 알 길이 없었다.”
고 합니다. 아무리 찾아도 알 길이 없고 심천봉이 돈봉 학산 잡록에 상세히 찾아보아도 그곳이 어디인지 전연 할 수 없다고 하여 이 설에 의하면 그곳은 잠시 본 무릉도원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장헌영, 남·54, 중앙동, 1981. 4. 27>
55. 고려장과 부모마음
우리가 옛날부터 고려장, 고려장 하지 않습니까? ‘인간 칠십 고래희’라고 해서 고려장 했는데 옛날부터 고려장 할 때는 부모님이 칠십만 되면 병이 없어도 산에 갖다가 생매장했다는 뜻인데.
에, 하루는 어떤 사람이 자식이 어머니를 지게에다 지고선 짚은 산 중에다 갖다 파묻을 라고 지고 갔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고속도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옛날엔 토끼 길만한 그런 질인데 그래 첩첩산중에 고려장 할라고 지게다 어머이를 지구선 갖는데, 어머이가 가면서 지게 꼭대기서 낭구까치를 대구꺽구선 가더란 이 말이예요. 그래서 그 참 이상하다 하구선 그 담에 묻을 장소에 가서 어머이를 낼쿠 놓구선,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러니까나,
“나는 이왕 죽는데 니가 지금 걸어온 길을 니가 집에 찾아 갈라면 못 찾아 갈끼다. 그러니 내가 낭구까치 꺽은 고것만 찾아가면 집에 갈터이니까, 그래서 니가 집에 못 찾아갈까봐 질을 찾으라고 낭구까치를 꺽구서 왔다.”
그거 한가지로 부모는 당장 땅속에 자식이 묻을 라구 가는데도 그래도 자식을 위해서 애처러워서 집에 잘 돌아가라고 일일이 낭구까치를 꺽어서 방향을 제시해 줬다는 얘깁니다.
<김용구, 남·68, 동명동14/2, 1992. 3. 27>
56. 구렁이가 된 총각
옛날에 총각, 처녀가 살고 있었지. 총각은 처녀를 짝사랑하고 있었지. 그러나 처녀는 청년이 싫었어. 그래 청년이 처녀에게 고백했지만, 처녀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어. 그래가지고 이 청년이 병이나 그 길로 눕게 되었어. 백방으로 약속을 써 봐도 완쾌되지 않는 거야.
결국 청년은 며칠 못 가서 죽고 말았어. 그런데도 처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 청년은 죽어서 구렁이가 되어서 처녀에게 복수를 했지.
어떻게 했냐고? 그건 바로 처녀의 몸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거야. 그래 처녀가 낙산사 의상대에 있는 그네에서 그네를 뛰었어. 구렁이를 몸에서 뛰어 낼려고 그런데도 떼어지지 않는 거야. 그래 결국 처녀는 그네를 뛰다가 그만 밑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지.
<김영임, 여. 70, 교동, 1999. 12. 17>
57. 날개달린 강장군 설화
강장군 이야기가 여기 있지. 강장군은 7대여. 내가 11대구. 내 자랑 같아서, 그게 강장군이 어떻게 된고 허니, 두 오누이가 살았다 이기여. 뉘두 힘 좋고 강장군은 총각이지. 여기 나루에 갔다가 그때 배가 크겠수? 고기 잡아오면
“야 강장군이다. 아이구 어떡하누.”
그래 강장군이 고기를 빼앗아 안 주거든.
“에이 강장군은 재수 없다.”
그래 그때는 밀주야.
“강장군, 참 내일부터 고기 드릴게. 잡수시우.”
하룻밤 그리구 내일 배가 나가드래. 그때 한 밤중이 되니까, 저 산중에 오리가 이리 번쩍, 저리 번쩍, 그래 가니까 강장군이 다니드라 이기야. 아치멩 떡 보니까 배가 거기 있드라 이기야.
강장군이 언제 한 줄 모른다 이기야. 그래 가만히 있더니 이거 질래 놔뒀다가 나와서 행짜 부릴까봐 ‘이거 안되겠다. 잡아야 되겠다.’하고 술을 잔뜩 먹여놓고 보니까 이짝에 뭐가 이 만큼 나왔드라 이기야. 날개가. 그래 가만히 보니까. 이 놈이 행짜 부릴까봐 술을 잔뜩 먹여 놓고는 숯불에다가 송곳을 달궈 꾹 찔러 죽였다 이기야. 양쪽 날개에다.
그래 사람들이 묻는데, ‘난 죽지 않았는데, 난 죽지 않았는데’하고 들썩들썩 하드라 이기야. 그래 사흘 있다가 용마가 서쪽으로 날아갔어. 그게 전설이지.
<강양수, 남·70, 장사동, 1994. 11. 2>
58. 설악산 다부골 청년
젊은 사람이 하나가 매일 어려서부터 죽만 먹고 그러니까 밥 먹은 거하고 죽 먹은 거하고 기운이 들날기 아닙니까. 배만 부르고 이래 인제 금방 또 소화가 잘 되고 이러니까 금방 또 배가 꺼지고 이러니까 그래서 그 다부골에 사는 청년이,
“야, 이렇게 죽만 먹고살면 뭐 하느냐 남은 잘 먹고 잘 살고 그러는데 에이, 아주 높은 산꼭대기 올라가서 어낭에 올라가 가지고 내려 떨어져서 투신자살해서 죽어야겠다.”
그러니까 어낭이 있는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말입니다. 올라가서 죽을라고 인제 그 어낭을 향해서 내려 쏟아질라고. 그러니까 뭐이 뒤에서 큰 힘으로 잡아 낙꾸는 기 있더라 이기래요. 그래서 뒤 돌아 보니까 아주 희안한 장부가 목덜미를 턱 잡고,
“젊은 사람이 왜 여기 낭떠러지서 떨어져 죽을라고 그러느냐?”
그래,
“내 죽 먹기 싫어서 죽을 라고 그런다.”
“니 타고난 팔자에 죽 삼만 그릇만 먹으면 그 다음에 아주 잘 사는데 고대를 못 참아서 순간적으로 죽을 라고 그러느냐? 죽 삼만 그릇을 먹는 고때에 만내자.”
그래고 고만 헤졌어요. 사람이 죽는 순간에 기분에 약간 돌리기만 하면은 되루 사니까 그래 이제 와서 부지런히 일하면서 이제 죽을 삼만 그릇을 먹으면은, 30년 정도 지난 다음에 고 다음에 인제 마침 죽을라고 그러던 때 목덜미 잡아 주던 사람이 나타나 가지고,
“니가 부자가 될라고 그러면은 산신령 있는데 가서 치성을 백일 동안 빌라.”
매일 한 번식 근데 이제 그 밑천이라는 것이 죽 먹으면서 한 숟가락씩 저축해 둔기 있었는데 그걸 뫄 가지고 팔아 보니까 삼십 냥이 되드라 이기래요. 그래서 인제 시장에 가서 소대가리하고 이제 제수 뭐 산신제 지내는데, 제물 준비 하느라고 삼십 냥을 가주 가서 준비를 해 가지고, 가주 와서 산신령 있는데 올라가서 제사를 지내고 그 퇴물을 먹지 않고 그냥 가주 와 가지고 시장에 가서 되팔아 가지고 또 쪼금 더 보태 가주고, 다시 올라가 가지고 또 산신제 지내고, 구십 구 그러니까 아흔 아홉 번을 끝냈어요.
그 다음에 인제 백 번째 가서 소를 바꾸려고 하니까 소대가리 파는데 가기만 하면은 아주 외뿔이 달랜 귀신 두 뿔이 달랜 귀신, 아주 뭐 이런 귀신들이 지키고 앉아서 들어가지 못하게 하드라 이기예요. 그러니까 고깃간에 가서 고기는 사지 못하겠고 요번 한 번만 가면 다 하겠는데 그런 귀신들이 자꾸 지키면서 못 들어가게 하니까 방법이 없어서,
“에라, 할 수 없다. 그냥 산신님 있는데 가서 돈 삼십 냥 갖다 놓고, 당신이 소를 뭐, 대가리 어떠 구해 가지고 잡숫던지 그러구 나는 돈 삼십 냥 갖다 놓고 기도 디리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산신기도 드리느라고 백 번째는 돈 삼십 냥 갖다가 놓고 산신 앞에 갖다 놓고 아주 지극한 정성으로 절을 하고,
“잘 살게 해 달라.”
그래 인제 치성을 드렸더니까, 조금 있더니까 치성 다 마치고 난 다음에, 아, 산돼지가 하나가 나타나더라 이기래요 아, 멧돼지가 그래서,
“저 놈의 멧돼지를 잡아 가지구 인제 산신 제사 지내도 되겠다.”
그래서 멧돼지를 잡을 라고 쫓아가는데 멧돼지가 아주 높은 산꼭대기 올라가고 자기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데 올라갔는데 그 산돼지가 얘기했는데 어데 산신이 얘기 했는지 몰러도,
“니가 나를 위해서 제사 지내 주는 건 좋은데 아흔 아홉 마리 소고기를 자꾸 사기 때문에 무고한 생명들이 많이 죽었다. 어, 그러니까 마지막 백 번째 돈 갖다 주고 치성드리는 거는 그 돈 삼십 냥 가주고 너 보다 더 가난한 사람 있는데 내가 갖다 줬으니까, 그 정성이 갸륵하다. 그러니까 너 어떻든 간에 기도를 지성으로 들이고 백일을 채웠으니까, 이 멧돼지 따라서 나가가면 아주 잘 사는 동네로 인도해 줄 끼다.”
그래서 고 다음에는 멧돼지 죽일 생각도 안하고 멧돼지 가는 대로 따라서 몇 날 몇 일을 따라서 멧돼지 따라서 갔다 이깁니다. 그래더니까 어떤 오막살이집 몇 채 있는 동네루 딱 들어 갔는데 그 멧돼지 따라 다니느라고 잘사는 동네 가르쳐 준다고 그래 배 줄은 창지를 가지구 그 동네 앞에 가서 쓰러졌어요.
그러자 이제 그, 물동이 이고 나오든 처녀가 거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는 거 보고 그래 집에 어른들 있는데 얘기해 그 집으로 들어갔다 말입니다. 그래 그 집에 들어가 간호를 받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그 동네 사람들이 뭐 별루 그렇게 배 곯는 동네두 아니구 잘 사는 동네라 이기래요.
집은 비록 뭐 오막살이 집을 쓰고 있지만 잘 살더라. 그래 그 집에서 이제 그렇잖아도 노동력이 없어 가지구 그 사람보고 또 어데루 갈데도 없구 이래,
“여기가 어데냐?”
이러니까,
“설악산 다부골이다.”
이래요. 그래서 설악산 다부골에서 데릴사위 비 그래 가지구 거게서 죽 삼만 그릇을 먹고 그래 고 다음 이밥만 먹게 됐다, 이런 전설이 옛날부터 내려오는데, 그래서 인제 죽 먹으면 말이죠.
“아이 죽 먹기 싫다.”
어려서 그러면 말이죠,
“야, 이놈아. 니 이 다음에 커서 다부골에 가 가주고 이쁜 색시 얻고 살지 누가 아느냐?”
이런 얘기가 있어요.
<홍덕유, 남·54, 중앙동, 1981. 4. 27>
59. 스님의 일곱 자식
옛날에 산골짜긴데 아주 부자집 마나님이라구. 근데 남편은 아주 멀리 일을 다닌데 남해 쪽으로 일을 나가시고 그러는데. 남편이 나가고 없으면 혼자서 일주일도, 혼자계시고 한 달도 있고 두 달도 있고.
그래 여자가 그러고 있는데 한 삼 개월씩 있다가 아저씨가 오시고 그러는데 하루는 어떤 스님이 오셔 가지구 스님이 꼭 여자같이 이쁜 스님이야. 남자스님인데 그래 가꾸 시주를 좀 해달라고 시주를 들어달라고 그러니깐 뭐 그저그저 뭐 주는 거 있잖아.
그런 것 달라구 그러니까 그러면서 여자가 그 인제 여자가 얼굴 안색이 아주 안 좋은 안색으로 한숨을 푹 쉬면서 쌀을 떠다 주었데. 이제 스님이 ‘왜 한숨을 그렇게 길게 쉬냐’고 그러니까 ‘아휴, 꼭 죽고만 싶은 심정이다’고 이렇게 살아도 죽고만 싶은 심정이라고…… ‘왜 그러냐’고 그러니까 ‘아휴 난 이렇게 살아도 아저씨가 한번씩 출장을 가시면 석 달도 있다오고 한 달도 있다오고 그러는데 그냥 난 죽고만 싶다’고 막 그러는 거라.
이제 그러고 그러니까는 그러면 내가 그러면은 그럼 좋은 방법을 해주겠다고. 아저씨하고 오래 떨어지지 않고 애기도 빨리 생길 수 있는 방법을 해 주겠다고 있다고. 그러니 스님이 그래 ‘그러면 좀 해 달라’고 새댁이 그래.
그러니까 스님이 거서 묵고 있었어. 며칠하면 좋냐고 그러니 일주일간 하면 좋다고 그랬어. 그러는데 일주일간 했거든. 스님이 하라는 대로 했어. 했는데 인자 마지막 날에 비가 막 쏟아져 쏟아지는데 스님하고 새댁하고 같이 한방에서 있는데 여잔 줄만 알았는데 예뻐서 여잔 줄만 알았지.
근데 마지막 날쯤에 오늘 저녁쯤에 오늘 저녁이 마지막 하면은 인제 다 된다고. 인제 그래 그럼 그 마지막 날에 뭐를 다 채려놓고는 다하고 있더라는데 나중에는 둘이서 잠이 든거야. 둘이서 잠이 들었는데 아이고 이 스님이 남자 스님이여. 여자 그 배 위에다 발을 턱 걸치고 이렇게 잠을 자는 거라. 그런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밥을 해야 되는데 시어머니가 보니까 안 일어나는 거라.
그래서 그 시어머니가 혓바닥으로 침을 딱 발라놓고는 창구멍에다 이렇게 발라놓고는 구멍을 푹 뚫어갔고 이렇게 들여다봐. 이렇게 들여다보니까는 세상에 스님이 여잔 줄 알았더니 다리가 털이 시커먼게 다리를 자기 며느리 배 위에다가 딱 걸쳐갔고 자거든. 그러니까 시어머니가 자기도 모르게 그냥 엉겁결에 문을 딱 여는 것이 그냥 팔딱 떨어져 버렸어. 잠근 문이… 그래 갖고 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엉겁결에 뛰어 도망가 버리고. 며느리 보고 이제 그러는 거야. ‘세상에 그 스님이 여잔 줄 알았더니 남자 스님이다’고하면서 시어머니 보고 막 며느리보고 저질해.
에이 그날 저녁에 스님이 자면서 뭐라고 했는가 하면 만약에 아들 나면 애기를 이름을 뭐라고 지라고하고 이름을 잊어 버렸는데, 애기를 낳으면 파란 저고리에 빨간 띠를 눌러서 애기를 저고리에 입히라고 그랬어. 그러는데 진짜 그날 저녁에 애기를 뱃어.
애기가 임신이 되어가지고 애기를 인자 낳게 됐어. 낳게 됐는데 인제 하루는 스님이 인제 그 동네를 전혀 못 오는거라. 무서워서 인제 오는데 얼마 지나가서. 근데 그 애기를 낳아가지고는 낳는데 애기를 십 개월 있다가 애기를 낳는데 파란 저고리에 빨간띠를 둘러서 애기를 업어 가지고 나가는데 그런 똑같은 애기들이 일곱 명 있다는 거라. 그 애기가 일곱 명이… 그 스님이 낳은 애기라 그 애기가 전부다 다 그러고 하고는.
끝을 잘 모르 것는 디 여러분들도 이런 속음이 많이 있을 거라. 이런 스님들에게 속지 말어.
<진경희, 여·62, 교동, 1999. 12. 17>
60. 집안의 세 가지 소리
이거 뭐 다 아시는 얘기지만 에, 옛날부텀 내려오는 얘긴데 집안에는 세 가지 소리가 나야 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애우는 소리가 나야 하고, 두 번째는 글 읽는 소리가 나고 세 번째는 베짜는 소리가 나야 한다.
이 소리가 무슨 소린가 하면 애우는 소리는 집안에 자손들이 흥하게 되서, 에 잘된 다는 얘기고, 그 담에 글 읽는 소리는 자손들이 글읽는 학문을 연구해서 출세한다는 그런 뜻이고, 그 담에 베짜는 소리는 경제를 튼 있습니다.
현대는 한가지 더 첨가해서 비오는 소리가 나야 된다는 얘깁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문, 농사가 잘 될라면은 비가 마침 잘 와서 그래야 우리가 잘 살게 된다는 그런 뜻이 되서 현대에 와서는 네 가지 소리가 제일 듣기 좋다는 뜻입니다.
<김용구, 남·68, 동명동 14/2, 1992. 3. 27>
51. 소야팔경(所野八景)
속초에 고을 소자, 들 야자 소야팔경이 나오는데, 그러면 지금 현재 이쪽가면은 논산과 노학동 사이에 쏙 들어 가면은 골이 소야평야입니다. 소야평야가 되고 지금 청초호로 들어오는 내가 있는데요, 그기 저 달마봉에서 발원됩니다.
달마봉에서 발원되가 그 골짜기 물을 합쳐 갖고 내려 와서 이 청초호에 들어오는 건데, 이거를 소야천이라고 합니다. 소야천에 소야팔경이 있는데 지금, 현재 뭐가 있나 하면은 논산조양(論山朝陽), 그래서 지금 현재 조양동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그기 하나의 소야팔경에서 따온 하나의 조양입니다. 그럼 왜 그 논산조양이라고 했느냐. 논산이 아주 지대(地帶)가 낮습니다. 낮는데 아침 해가 뜨면은 제일 먼저 햇빛이 비치는 곳이 조양동입니다.
그래서 논산조양이라고 하고 그 다음 이 온정(溫井)조하 그래니까 이쪽에 저 온천지대가 있습니다. 온천지대가 있는데 이 온정(溫井)에 김이 납니다. 아침에 인제 안개 구름같이 쫙 깔려 있는 그것이 하나의 경이 됩니다. 산은 우에 솟아 있고 산 중허리를 쫙 구름이 감겨가 있는 것같이 그렇게 해서 온정조하(溫井朝霞).
그 다음에 하나는 노동명월(蘆洞明月), 노동이라 하면은 갈골, 노학동 갈골에서 이걸 보면 저녁에 달밤에 갈밭에서 보면 경이 또 하나의 좋은 경이 됩니다.
그 다음 저 위에 올라 가면은 지금에 배목리라 그러지요. 배목리 그러니까 이동백설(梨洞白雪). 거는 배나무밭이 많아서 말이죠. 봄에 꽃이 확피어 가지고 꽃이 떨어질 때 꼭 눈이 와서 말이죠 설경같은 이러한 경이 있었다. 이래서 이동백설.
그 다음이 청대화병(靑垈畵屛)이라 하죠. 그 다음에 이쪽에 옛날에는 주교(舟橋) 지금도 청호동을 건너 가는데 배가 있었죠. 저걸 배다리, 그걸 갖다가 주교, 주교야화(舟橋夜火), 그러니까 저녁으로 불을 밝혀가지고 배다리를 왔다 갔다 하면서 하는 기 주교야화다.
그 다음에 여기 청초호도 그 때 물이 맑으니까 청초마경(靑草磨鏡). 그 다음에 하나는 마지막에 노도귀범(鷺島歸帆). 노도귀범이란 저 앞에 보이는 섬입니다. 저걸 갖다가 우리가 새섬이라고 하는데 갈매기 노(鷺)자를 씁니다. 우리가 청구도 지도에서 보면 명칭 나오는 것이 갈매기 노잡니다. 노돕니다. 갈매기도 새는 새니까 새섬이라 이렇게 합니다.
노도귀범, 그러니까 지금의 풍경을 느낄 수 있느냐 하면은 조양동 해수욕장에서 말이죠, 이렇게 저 노도를 중심으로 해 가지고 이쪽에 저 영금정(靈琴亭)하고 그 사이에서 배가 지나갈 때 보면은 하나의 경을 이룹니다. 완전한 경을 이룹니다. 그래서 이 노도귀범은 항구를 들어오는 과정을 말합니다.
<장헌영, 남·54, 중앙동, 1981. 4. 27>
52. 양폭과 음폭
설악에는 양폭이 있고 음폭이라는 게 있는데요. 양폭이라고 하는 것은 그 어느 분들 대부분 양폭이라고, 두 개가 떨어져서 똑같이 떨어져서 양폭인 줄 알고 하는데, 그게 그래. 인제 대청봉이라는데 인제 양폭이라고 하는 데가 있는데, 양폭이라는 데는 폭이 한 25m 밖에 안 돼요, 길이가.
이 폭이야 뭐 얼마 안되고 한 2m정도 되고 길이가 25m정도 되는데, 거기서부텀 계곡이 두 갈래가 생기는데, 그래 인제 우측 계곡에 양폭이 있고, 좌측 계곡에 음폭이 있어요.
그래 인제 우측 계곡에는 양폭에서 한 50m 올라 가면 천당폭포, 그 천불동 계곡에 인제 마지막 상간 폭포라 해서 하늘 천(天)자, 무리 당(黨)자 해서 천당폭포래는 폭포가 하나 있고, 천당폭포 위로 조그만 무명폭이 하나 있는데 좋지도 못한 폭포가 뭐 하나 있고, 그래서 인제 양폭에 인제 계곡으로 올라 가면 양쪽으로 쭈욱 올라 가면 죽음의 계곡이라고 하는 계곡이 있어요.
죽음의 계곡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와서 죽음의 계곡이라고 불리었지 그전에는 그 백미폭, 건폭. 그 비가 와서 물이 흘러야 폭포가 흐르고, 말라 있다. 그래 마를 건(乾)자, 백미터 폭포. 백미터나 길이가 되는 폭포다. 그것이 비가 오면 물이 많아서, 폭포가 좋으나 물이 없고 가물었을 때는 말라 있다. 그래 건폭(乾瀑)이라고 불리고 백미폭이라고도 불리었어요.
그리고 음폭이라고 하는 데는 양폭에 그 두 갈래로 계곡이 있는데, 그 좌측 계곡으로 올라 가면 그게 음폭인데, 음폭이라고 하는 것은 양폭에서 한 200m 올라 가면 그게 음폭인데. 그게 좀 올라 가기가 바우절벽이래서 올라 가기가 좀 험상 궂은데 거기는 그 여자의 음모냥 아주 흡사 그 여자의 음처럼 생겼다.
그래서 거 음폭이라고 이름을 칭호를 붙이고, 그래 음폭, 음폭이 있으니 또 양폭이 있어야지, 남자가 있어야지, 여자가 있어야 된다. 그래 음양이라는 뜻에 한해서 양폭이니 음폭이라고 불리어 오고 있습니다.
<유만석, 남·50, 설악동, 1981. 4. 18>
53. 계조암과 송강 정철
계조암 얘기가 인제 그기 유명한 얘긴데, 계조암은 누가 창건했냐 하믄, 시기가 자장율사의 제자, 잘하는 사람은 도제를 놔요, 길도(道), 아우제(弟), 도사란 이말이요. 자장율사의 제자라 안하구 도제라 하지요.
자장율사가 가구 나서 두운조사가 계조암을 창건했지요. 창건핸 지가 1,200여년이 됐어요. 자장율사는 그 위에 분이니까. 들어와 처음 들어와서 향성사만 짓구.
두운조사가 계조암을 창건하는데 계조암 특징이 뭐냐하니까 계조암에는 사람이 죽어 본 적이 없어요. 그 절안에서 사람이 앓아서 죽을 무렵이 되면 자연히 그 사람이 저절로 나가게 되는게 그게 특징이구.
계조암은 남자바우 여자바우가 있어요. 계조암에 바위가 이렇게 있는데 여자바우여. 이렇게 이 바위 뒤로 문으로 들어가는 남쪽에 이렇게 쫙 벌리고 있지 그기 수문바우여. 근데 남자바우가 어디 있냐믄 옛날엔 흔들바우가 둘이라고, 둘인데 흔들바우 우짝에 전나무가 하나가 있지. 고 밑에 뾰족하게 나온 게 그기 남자바우가 그 위에 있었는데 송강 정철이가 그걸 말짱 계조암을 파산을 맨들어야 해겠어서, 그 왜 파산을 맨들을라 했냐면 이 명산을 그냥 두면 인물영웅이 나서 인제 그러니까 여느 사람들은 일본사람들이 와서 그랬다구, 아무것 두 모르는 사람이 그러지 용바우 묻었다구.
그렇지만 나라에서 아마 이태조가 들어선 이후에 명승지를 찾아다 그래 인제 정철이가 아주 지리박사거든. 지리박사니까 좋은 데 돌아다녀도 계조암만큼 좋은 데가 없거든.
계조암은 앞의 흔들바우가 소가 동쪽으로 누웠는데 입이 다 있구 눈이 다 있어. 그게 흔들바위가 그 소뿔인데, 계조암으로 들어가서 저짝으로 나가면 변소깐 쪽으로 가서 터 새로 딱은, 거기서 그 바우를 보면 쇠꼬장지가 뚝 끊어졌어. 그거 쇠꽁지가 뚝 끊어 자빠졌어. 소꽁지를 끊었어. 소 응덩이에다 두 자나 되게 징으로 많이 팠어요.
핑 둘레 징으로 쪼쿠는 하여간 정철이란 사람이 영웅이여. 어딜 쪼았는지 엿장사 엿깨듯이 단번에 쫙 깨서 나가 떨어졌어. 그건 누구 거기 다 보면 그냥봐서는 아무 것도 모르지, 그걸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거든. 아직 징자리가 남아 있으니까. 쇠꽁지를 끊구, 쇠뿔을 빼구 그랬어요.
계조암 전체 바우는 목탁바우라 부르지. 목탁바운데, 인제 중이 이상 더 부지런한 사람이 없거든, 중이 새벽에 잠을 자면 목탁바우가 운다는 거지, “딱딱”하고 중을 깨운다는 거지.
<박일호, 남·78, 노학동 2/5, 1992. 4. 5>
54. 영랑호에서 다시 만난 친구
어느 때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 아득한 옛날 일이라 합니다. 한 동리에 그 다정한 두 친구가 서로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 우연히 이별을 하게 되었다 합니다. 다정히 지내던 그 친구와 갑자기 이별을 하게 된 것이 서러워서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 의복을 적셨지요. 적시면서 이별하고 통 그 소식을 모르고 한 10년이 지나도록 서로 종무소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에, 하루는 이별하던 그때 그곳에 당시 한 구절이 있었는데 그 구절이 그때에는 청운에 돌아갈 것이며 나는 청유산을 바라보고 돌아간다 라고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그 친구중의 한 사람의 이름은 만수 만취 오옥령이라는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서로 헤어진 지 10년이 지난 그 어느 날 오옥령은 관동당력이 되어 해상을 순회할 제에 10년 전에 이별했던 친구를 영랑호에서 작은 배를 타고서 즐기고 있는 것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래서 그때 그 오공이 말하기를,
“군은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가?”
하고 물은즉 나는 미시령 아래 화엄사 동굴에서, 동굴에서 살고 있었다고 하고 또는 그 회령군에도 있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이 하루는 그곳을 한 번 찾아서 친구가 말하던 굴에 들어가 본 즉은 일월이 명랑하고 주택이 화려하며 또 춤추는 아이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오공은 참으로 가여히 여겨서 다시 그 친구를 보고,
“군은 어떻게 하여 이곳을 알고 찾아왔는가?”
하고 물어본즉,
“이런 곳이 수 십여 처가 있다고 말하므로 그 후 재차 찾아갔으나 알 길이 없었다.”
고 합니다. 아무리 찾아도 알 길이 없고 심천봉이 돈봉 학산 잡록에 상세히 찾아보아도 그곳이 어디인지 전연 할 수 없다고 하여 이 설에 의하면 그곳은 잠시 본 무릉도원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장헌영, 남·54, 중앙동, 1981. 4. 27>
55. 고려장과 부모마음
우리가 옛날부터 고려장, 고려장 하지 않습니까? ‘인간 칠십 고래희’라고 해서 고려장 했는데 옛날부터 고려장 할 때는 부모님이 칠십만 되면 병이 없어도 산에 갖다가 생매장했다는 뜻인데.
에, 하루는 어떤 사람이 자식이 어머니를 지게에다 지고선 짚은 산 중에다 갖다 파묻을 라고 지고 갔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고속도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옛날엔 토끼 길만한 그런 질인데 그래 첩첩산중에 고려장 할라고 지게다 어머이를 지구선 갖는데, 어머이가 가면서 지게 꼭대기서 낭구까치를 대구꺽구선 가더란 이 말이예요. 그래서 그 참 이상하다 하구선 그 담에 묻을 장소에 가서 어머이를 낼쿠 놓구선,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러니까나,
“나는 이왕 죽는데 니가 지금 걸어온 길을 니가 집에 찾아 갈라면 못 찾아 갈끼다. 그러니 내가 낭구까치 꺽은 고것만 찾아가면 집에 갈터이니까, 그래서 니가 집에 못 찾아갈까봐 질을 찾으라고 낭구까치를 꺽구서 왔다.”
그거 한가지로 부모는 당장 땅속에 자식이 묻을 라구 가는데도 그래도 자식을 위해서 애처러워서 집에 잘 돌아가라고 일일이 낭구까치를 꺽어서 방향을 제시해 줬다는 얘깁니다.
<김용구, 남·68, 동명동14/2, 1992. 3. 27>
56. 구렁이가 된 총각
옛날에 총각, 처녀가 살고 있었지. 총각은 처녀를 짝사랑하고 있었지. 그러나 처녀는 청년이 싫었어. 그래 청년이 처녀에게 고백했지만, 처녀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어. 그래가지고 이 청년이 병이나 그 길로 눕게 되었어. 백방으로 약속을 써 봐도 완쾌되지 않는 거야.
결국 청년은 며칠 못 가서 죽고 말았어. 그런데도 처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 청년은 죽어서 구렁이가 되어서 처녀에게 복수를 했지.
어떻게 했냐고? 그건 바로 처녀의 몸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거야. 그래 처녀가 낙산사 의상대에 있는 그네에서 그네를 뛰었어. 구렁이를 몸에서 뛰어 낼려고 그런데도 떼어지지 않는 거야. 그래 결국 처녀는 그네를 뛰다가 그만 밑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지.
<김영임, 여. 70, 교동, 1999. 12. 17>
57. 날개달린 강장군 설화
강장군 이야기가 여기 있지. 강장군은 7대여. 내가 11대구. 내 자랑 같아서, 그게 강장군이 어떻게 된고 허니, 두 오누이가 살았다 이기여. 뉘두 힘 좋고 강장군은 총각이지. 여기 나루에 갔다가 그때 배가 크겠수? 고기 잡아오면
“야 강장군이다. 아이구 어떡하누.”
그래 강장군이 고기를 빼앗아 안 주거든.
“에이 강장군은 재수 없다.”
그래 그때는 밀주야.
“강장군, 참 내일부터 고기 드릴게. 잡수시우.”
하룻밤 그리구 내일 배가 나가드래. 그때 한 밤중이 되니까, 저 산중에 오리가 이리 번쩍, 저리 번쩍, 그래 가니까 강장군이 다니드라 이기야. 아치멩 떡 보니까 배가 거기 있드라 이기야.
강장군이 언제 한 줄 모른다 이기야. 그래 가만히 있더니 이거 질래 놔뒀다가 나와서 행짜 부릴까봐 ‘이거 안되겠다. 잡아야 되겠다.’하고 술을 잔뜩 먹여놓고 보니까 이짝에 뭐가 이 만큼 나왔드라 이기야. 날개가. 그래 가만히 보니까. 이 놈이 행짜 부릴까봐 술을 잔뜩 먹여 놓고는 숯불에다가 송곳을 달궈 꾹 찔러 죽였다 이기야. 양쪽 날개에다.
그래 사람들이 묻는데, ‘난 죽지 않았는데, 난 죽지 않았는데’하고 들썩들썩 하드라 이기야. 그래 사흘 있다가 용마가 서쪽으로 날아갔어. 그게 전설이지.
<강양수, 남·70, 장사동, 1994. 11. 2>
58. 설악산 다부골 청년
젊은 사람이 하나가 매일 어려서부터 죽만 먹고 그러니까 밥 먹은 거하고 죽 먹은 거하고 기운이 들날기 아닙니까. 배만 부르고 이래 인제 금방 또 소화가 잘 되고 이러니까 금방 또 배가 꺼지고 이러니까 그래서 그 다부골에 사는 청년이,
“야, 이렇게 죽만 먹고살면 뭐 하느냐 남은 잘 먹고 잘 살고 그러는데 에이, 아주 높은 산꼭대기 올라가서 어낭에 올라가 가지고 내려 떨어져서 투신자살해서 죽어야겠다.”
그러니까 어낭이 있는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말입니다. 올라가서 죽을라고 인제 그 어낭을 향해서 내려 쏟아질라고. 그러니까 뭐이 뒤에서 큰 힘으로 잡아 낙꾸는 기 있더라 이기래요. 그래서 뒤 돌아 보니까 아주 희안한 장부가 목덜미를 턱 잡고,
“젊은 사람이 왜 여기 낭떠러지서 떨어져 죽을라고 그러느냐?”
그래,
“내 죽 먹기 싫어서 죽을 라고 그런다.”
“니 타고난 팔자에 죽 삼만 그릇만 먹으면 그 다음에 아주 잘 사는데 고대를 못 참아서 순간적으로 죽을 라고 그러느냐? 죽 삼만 그릇을 먹는 고때에 만내자.”
그래고 고만 헤졌어요. 사람이 죽는 순간에 기분에 약간 돌리기만 하면은 되루 사니까 그래 이제 와서 부지런히 일하면서 이제 죽을 삼만 그릇을 먹으면은, 30년 정도 지난 다음에 고 다음에 인제 마침 죽을라고 그러던 때 목덜미 잡아 주던 사람이 나타나 가지고,
“니가 부자가 될라고 그러면은 산신령 있는데 가서 치성을 백일 동안 빌라.”
매일 한 번식 근데 이제 그 밑천이라는 것이 죽 먹으면서 한 숟가락씩 저축해 둔기 있었는데 그걸 뫄 가지고 팔아 보니까 삼십 냥이 되드라 이기래요. 그래서 인제 시장에 가서 소대가리하고 이제 제수 뭐 산신제 지내는데, 제물 준비 하느라고 삼십 냥을 가주 가서 준비를 해 가지고, 가주 와서 산신령 있는데 올라가서 제사를 지내고 그 퇴물을 먹지 않고 그냥 가주 와 가지고 시장에 가서 되팔아 가지고 또 쪼금 더 보태 가주고, 다시 올라가 가지고 또 산신제 지내고, 구십 구 그러니까 아흔 아홉 번을 끝냈어요.
그 다음에 인제 백 번째 가서 소를 바꾸려고 하니까 소대가리 파는데 가기만 하면은 아주 외뿔이 달랜 귀신 두 뿔이 달랜 귀신, 아주 뭐 이런 귀신들이 지키고 앉아서 들어가지 못하게 하드라 이기예요. 그러니까 고깃간에 가서 고기는 사지 못하겠고 요번 한 번만 가면 다 하겠는데 그런 귀신들이 자꾸 지키면서 못 들어가게 하니까 방법이 없어서,
“에라, 할 수 없다. 그냥 산신님 있는데 가서 돈 삼십 냥 갖다 놓고, 당신이 소를 뭐, 대가리 어떠 구해 가지고 잡숫던지 그러구 나는 돈 삼십 냥 갖다 놓고 기도 디리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산신기도 드리느라고 백 번째는 돈 삼십 냥 갖다가 놓고 산신 앞에 갖다 놓고 아주 지극한 정성으로 절을 하고,
“잘 살게 해 달라.”
그래 인제 치성을 드렸더니까, 조금 있더니까 치성 다 마치고 난 다음에, 아, 산돼지가 하나가 나타나더라 이기래요 아, 멧돼지가 그래서,
“저 놈의 멧돼지를 잡아 가지구 인제 산신 제사 지내도 되겠다.”
그래서 멧돼지를 잡을 라고 쫓아가는데 멧돼지가 아주 높은 산꼭대기 올라가고 자기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데 올라갔는데 그 산돼지가 얘기했는데 어데 산신이 얘기 했는지 몰러도,
“니가 나를 위해서 제사 지내 주는 건 좋은데 아흔 아홉 마리 소고기를 자꾸 사기 때문에 무고한 생명들이 많이 죽었다. 어, 그러니까 마지막 백 번째 돈 갖다 주고 치성드리는 거는 그 돈 삼십 냥 가주고 너 보다 더 가난한 사람 있는데 내가 갖다 줬으니까, 그 정성이 갸륵하다. 그러니까 너 어떻든 간에 기도를 지성으로 들이고 백일을 채웠으니까, 이 멧돼지 따라서 나가가면 아주 잘 사는 동네로 인도해 줄 끼다.”
그래서 고 다음에는 멧돼지 죽일 생각도 안하고 멧돼지 가는 대로 따라서 몇 날 몇 일을 따라서 멧돼지 따라서 갔다 이깁니다. 그래더니까 어떤 오막살이집 몇 채 있는 동네루 딱 들어 갔는데 그 멧돼지 따라 다니느라고 잘사는 동네 가르쳐 준다고 그래 배 줄은 창지를 가지구 그 동네 앞에 가서 쓰러졌어요.
그러자 이제 그, 물동이 이고 나오든 처녀가 거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는 거 보고 그래 집에 어른들 있는데 얘기해 그 집으로 들어갔다 말입니다. 그래 그 집에 들어가 간호를 받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그 동네 사람들이 뭐 별루 그렇게 배 곯는 동네두 아니구 잘 사는 동네라 이기래요.
집은 비록 뭐 오막살이 집을 쓰고 있지만 잘 살더라. 그래 그 집에서 이제 그렇잖아도 노동력이 없어 가지구 그 사람보고 또 어데루 갈데도 없구 이래,
“여기가 어데냐?”
이러니까,
“설악산 다부골이다.”
이래요. 그래서 설악산 다부골에서 데릴사위 비 그래 가지구 거게서 죽 삼만 그릇을 먹고 그래 고 다음 이밥만 먹게 됐다, 이런 전설이 옛날부터 내려오는데, 그래서 인제 죽 먹으면 말이죠.
“아이 죽 먹기 싫다.”
어려서 그러면 말이죠,
“야, 이놈아. 니 이 다음에 커서 다부골에 가 가주고 이쁜 색시 얻고 살지 누가 아느냐?”
이런 얘기가 있어요.
<홍덕유, 남·54, 중앙동, 1981. 4. 27>
59. 스님의 일곱 자식
옛날에 산골짜긴데 아주 부자집 마나님이라구. 근데 남편은 아주 멀리 일을 다닌데 남해 쪽으로 일을 나가시고 그러는데. 남편이 나가고 없으면 혼자서 일주일도, 혼자계시고 한 달도 있고 두 달도 있고.
그래 여자가 그러고 있는데 한 삼 개월씩 있다가 아저씨가 오시고 그러는데 하루는 어떤 스님이 오셔 가지구 스님이 꼭 여자같이 이쁜 스님이야. 남자스님인데 그래 가꾸 시주를 좀 해달라고 시주를 들어달라고 그러니깐 뭐 그저그저 뭐 주는 거 있잖아.
그런 것 달라구 그러니까 그러면서 여자가 그 인제 여자가 얼굴 안색이 아주 안 좋은 안색으로 한숨을 푹 쉬면서 쌀을 떠다 주었데. 이제 스님이 ‘왜 한숨을 그렇게 길게 쉬냐’고 그러니까 ‘아휴, 꼭 죽고만 싶은 심정이다’고 이렇게 살아도 죽고만 싶은 심정이라고…… ‘왜 그러냐’고 그러니까 ‘아휴 난 이렇게 살아도 아저씨가 한번씩 출장을 가시면 석 달도 있다오고 한 달도 있다오고 그러는데 그냥 난 죽고만 싶다’고 막 그러는 거라.
이제 그러고 그러니까는 그러면 내가 그러면은 그럼 좋은 방법을 해주겠다고. 아저씨하고 오래 떨어지지 않고 애기도 빨리 생길 수 있는 방법을 해 주겠다고 있다고. 그러니 스님이 그래 ‘그러면 좀 해 달라’고 새댁이 그래.
그러니까 스님이 거서 묵고 있었어. 며칠하면 좋냐고 그러니 일주일간 하면 좋다고 그랬어. 그러는데 일주일간 했거든. 스님이 하라는 대로 했어. 했는데 인자 마지막 날에 비가 막 쏟아져 쏟아지는데 스님하고 새댁하고 같이 한방에서 있는데 여잔 줄만 알았는데 예뻐서 여잔 줄만 알았지.
근데 마지막 날쯤에 오늘 저녁쯤에 오늘 저녁이 마지막 하면은 인제 다 된다고. 인제 그래 그럼 그 마지막 날에 뭐를 다 채려놓고는 다하고 있더라는데 나중에는 둘이서 잠이 든거야. 둘이서 잠이 들었는데 아이고 이 스님이 남자 스님이여. 여자 그 배 위에다 발을 턱 걸치고 이렇게 잠을 자는 거라. 그런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밥을 해야 되는데 시어머니가 보니까 안 일어나는 거라.
그래서 그 시어머니가 혓바닥으로 침을 딱 발라놓고는 창구멍에다 이렇게 발라놓고는 구멍을 푹 뚫어갔고 이렇게 들여다봐. 이렇게 들여다보니까는 세상에 스님이 여잔 줄 알았더니 다리가 털이 시커먼게 다리를 자기 며느리 배 위에다가 딱 걸쳐갔고 자거든. 그러니까 시어머니가 자기도 모르게 그냥 엉겁결에 문을 딱 여는 것이 그냥 팔딱 떨어져 버렸어. 잠근 문이… 그래 갖고 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엉겁결에 뛰어 도망가 버리고. 며느리 보고 이제 그러는 거야. ‘세상에 그 스님이 여잔 줄 알았더니 남자 스님이다’고하면서 시어머니 보고 막 며느리보고 저질해.
에이 그날 저녁에 스님이 자면서 뭐라고 했는가 하면 만약에 아들 나면 애기를 이름을 뭐라고 지라고하고 이름을 잊어 버렸는데, 애기를 낳으면 파란 저고리에 빨간 띠를 눌러서 애기를 저고리에 입히라고 그랬어. 그러는데 진짜 그날 저녁에 애기를 뱃어.
애기가 임신이 되어가지고 애기를 인자 낳게 됐어. 낳게 됐는데 인제 하루는 스님이 인제 그 동네를 전혀 못 오는거라. 무서워서 인제 오는데 얼마 지나가서. 근데 그 애기를 낳아가지고는 낳는데 애기를 십 개월 있다가 애기를 낳는데 파란 저고리에 빨간띠를 둘러서 애기를 업어 가지고 나가는데 그런 똑같은 애기들이 일곱 명 있다는 거라. 그 애기가 일곱 명이… 그 스님이 낳은 애기라 그 애기가 전부다 다 그러고 하고는.
끝을 잘 모르 것는 디 여러분들도 이런 속음이 많이 있을 거라. 이런 스님들에게 속지 말어.
<진경희, 여·62, 교동, 1999. 12. 17>
60. 집안의 세 가지 소리
이거 뭐 다 아시는 얘기지만 에, 옛날부텀 내려오는 얘긴데 집안에는 세 가지 소리가 나야 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애우는 소리가 나야 하고, 두 번째는 글 읽는 소리가 나고 세 번째는 베짜는 소리가 나야 한다.
이 소리가 무슨 소린가 하면 애우는 소리는 집안에 자손들이 흥하게 되서, 에 잘된 다는 얘기고, 그 담에 글 읽는 소리는 자손들이 글읽는 학문을 연구해서 출세한다는 그런 뜻이고, 그 담에 베짜는 소리는 경제를 튼 있습니다.
현대는 한가지 더 첨가해서 비오는 소리가 나야 된다는 얘깁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문, 농사가 잘 될라면은 비가 마침 잘 와서 그래야 우리가 잘 살게 된다는 그런 뜻이 되서 현대에 와서는 네 가지 소리가 제일 듣기 좋다는 뜻입니다.
<김용구, 남·68, 동명동 14/2, 1992. 3.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