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비문학 5

관리자
202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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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노학동 유래

  노학에서 노자는 갈대 노(蘆)자를 쓰고, 학은 학(鶴) 자를 쓰는데 예전에는 노학동은 갈골마을이라 얘기를 하고 갈대 숲과 학이 있는 곳을 말하지요.
옛날에는 이쪽에 온정리, 논산리 지역 저쪽에 노리지역, 노리지역 합해서 노리마을이라고 얘기한 게 노동리라고도 이야기를 하는 게 그쪽지역에 크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 노리지역과 척산마을을 옛날에 향촌이 형성이 되는 그 역사성은 그쪽으로 갔어요.

  그리고 이게 특히 척산마을에 관련해서는 옛날에 대포항에 수군 병영지가 있었어요.

<김철환, 남·37, 노학동, 1999. 11. 20>


42. 노학동 유래

  옛날 이곳 노학동에는 다음과 같이 전설이 내려오고 있어요. 이곳에 이씨 성을 가진 대가가 살고 있었는데 이 이씨 집안에는 대대로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한 사람도 많고 학문의 경지에 오른 대 학자도 많이 난 명문 대가입니다.

  그렇게 명성과 학문을 날리던 그 이씨집안은 어느 때 부터인지 점점 가문이 기울기 시작하여 과거에 급제하는 일도 거의 없고 대 학자도 나타나지 않고 가문의 명예를 오히려 떨어뜨리는 불순한 일도 가끔 발생하곤 하였다고 해요.

  이렇게 되자 이씨 가문의 어른들이 모여서 대가의 여러 문제점을 검토하고 의논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당시만 하여도 풍수지리설을 매우 신봉하던 터이라 지관을 모셔다가 선조의 묘소를 돌아보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묘소 앞 편에 산사태로 산이 많이 유실되어 나간 곳을 알게 되었데요. 그 지관은 유실된 그 곳을 유심히 이러저리 살펴보기 시작하고 그는 무릎을 탁 치면서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이 유실된 이 자리가 설악산 중에서 최고의 명당터일줄이야. 그리하여 그 지관은 그 같이 갔던 이씨 문중의 어른들에게 여기가 설악산 최고의 명당인데 이렇게 유실되었으니 이씨 집안의 운이 소멸될 수밖에 없다고 일러 주었다고 해요.

  그러자 그 중 한 사람이

  “그럼 지관 어른, 이렇게 명당이 유실된 파명당이 되어 우리 가문이 쇠하게 되었는데 뭐 좀 좋은 방도가 없겠습니까?”

  그러자 그 중 또 한 사람이

  “지관 어른, 속는 셈치고 그 방법을 일러주면 우리들이 최선의 노력을 강구하겠으니 그 방도를 일러주시지요?”

  그 지관은 이렇게 하는 방법을 일러줄 터이니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보장이 없다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옛날에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다시 명당을 복원하여 후손이 흉하고 보긍받은 일이 가끔 있기는 하였는데 하여튼 이 파명당을 다시 복원하여 보시지요.”

  그래서 그들은 일꾼을 얻어서 파명당 자리를 다시 흙으로 메우고 다지고 하여 한창 공사를 진행할 즈음에 이 이씨 문중에 가장 나이든 어른이 돌아가셨어요.

  문중에서는 이 어른을 모셔야 될 산소자리에 관하여 의논을 하기 시작했어요. 한편에서는 지금 복원하고 있는 파명당 자리에 모셔야 우리 후손이 복을 받고 길할 수 있다는 의견과 아직 다 복원도 안되고 또한 설령되었다 하더라도 그곳이 명당의 기운을 발할 수 있는 곳인지도 모르는 처지에 그곳에다 모실 수 없지 않느냐는 신중론이 대립하게 되었어요. 그들은 갑론을 박하여 몇 차례 다시 만나 숙위를 하기 시작했데요.

  그도 그럴 것이 이 가문의 흥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아주 예민한 문제인지라 결론이 나기가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러나 가문의 제일 연로하신 어른이 돌아가셨으니 복원하는 파명당 자리에 모시기로 의논을 모았어요. 이 사실을 지관과 의논하였더니 그 지관은 한참 생각하다가 ‘그러면 묘자리를 너무 깊게 파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단단히 일러주었어요. 인부들을 시켜서 묘자리를 만들기 시작하여 정해진 깊이 만큼 파내려 갔는데 한 인부가 잘못하여 그 깊이 이하로 삽질을 하게 되었어요.

  그러자 갑자기 땅이 움직이더니 하얀 학 두 마리가 광채를 발하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놀라고 황홀하여 한참 동안 정신을 잃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대요.

  학 두 마리는 하늘을 몇 번 선회하다가 한 마리는 지금의 학사평 쪽으로 또 한 마리는 양양 쪽으로 날아갔다고 해요.

  원래 학사평은 옛날에 시인 묵객들이 많이 드나드는 정자가 하나 있었는데 많은 선비들이 이곳을 출입하여 왔다고 하여 학사평을 배울 학(學), 선비 사(士), 평야 평(坪) 하여 학사평(學士坪)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그런데 이 학이 내려앉고 부터는 또한 모래도 많고 하여 학 학(鶴), 모래사(沙), 들 평(坪)하여 학사평(鶴沙坪)이라 하였어요.

  이학은 여기 학사평에 잠깐 내려앉았다가 지금의 노학동으로 날아 가버렸어요.

  노학동은 원래 노동, 즉 갈대가 많은 고을이라 하여 갈 노(蘆), 고을 동(洞)하여 노동(蘆洞)이었는데 학이 왔다하여 노학동(蘆鶴洞)으로 불리게 되었고 한편 양양 쪽으로 날아간 학은 양양에 학포리(鶴浦里)란 지명을 얻게 하였다고 합니다.

<척산리 이장, 1999. 12. 3>


43. 대청봉 유래

  소청봉으로 올라가자면 소청봉 보통 시간은 보통 걸음걸이로 가지고서 두 시간 삼 십분 이렇게 기어오르게 되는데, 아주 올라가다 보면 힘이 어떻게나 들고 숨이 가빠가지고 아주 숨이 하늘에 닿은 거와 같이하고, 뭐 이전에 제비도 날라 가다 나는 제비도 올라 와서 하품을 했다는 그런 얘기도 했지요.
그 소청봉, 중청봉, 대청봉이라고 하면, 소청봉은 해발 1,638m, 중청봉 1,660m, 대청봉은 1,708m 그래 제일 높은 산이고 소청, 중청, 대청봉 그게 3형제 봉우리인데 그 전설이 있어요.

  이 소청봉, 중청봉, 대청봉을 귀때기 청봉이라는 것하고, 작은 귀때기청봉, 귀때기 청봉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 어디선가는 이 소청봉, 중청봉, 대청봉 3형제가 인제 거기 와서 인제 대청봉이 어른이고, 고 담에 중청봉, 고 담에 소청봉이 막내고 이렇게 인제 하구선 다정하게 거기서 살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별안간 두 놈이 나타나서 냅따 공갈을 형인테다 대청봉 있는 데다 공갈을 막 때려 가지고.

  “뭐, 이까짓 게 뭐 성(형)이야, 내가 성이지.”

  하고 냅다 후려 패네. 그래 둘이 대청봉을 후레 패니까 대청봉이 벌벌벌 떨고 있으니, 가만 보니 소청봉하고 중청봉하고 보니,

  “안된다. 우리가 성이 이렇게 맞았을 적에는 우리가 합심해서 저 단결을 해 가지고 그걸 물리쳐야 되겠다.”

  그래 소청봉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보다 즉은(적은)새끼가 와서 노릇을 하겠다고 하니 같잖으니까,

  “이 안 되겠다. 우리 스이(셋이) 다 합심해 가지고 저걸 물리치자 후려 때리고 말이야.”

  그래 가지고 중청봉이 그냥 용기를 내서 냅다 그냥 귀때기를 쳐 가지고 귀때기를 치니까. 귀때기가 한 쪽이 떨어져 나가서 지금 거 가서 청봉이 하나 생겼는데, 큰귀때기청봉, 작은귀때기청봉, 그래 형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 보면 큰귀때기청봉은 올라가면 아주 좁아요.

<유만석, 남·50, 설악동, 1981. 4. 18>


44. 도리원 유래

  도리원은 복숭아나무라든가 배나무골, 이목리같은 경우 옛날 배나무골이라고 해서 마을명이 그렇게 명명이 돼서 이목리, 도리원리 그런 식으로 부르게 되었고, 그 다음에 이제 저쪽에 신흥촌이라든가 자활촌 같은 경우 아주 최근에 60년대 어떤 게 있었나 하면은 박정희 정권때 깡패들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을 소탕하는 지역이었어요.

  그 사람들 정화차원에서 그 재건활동 같은 게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말하자면 그 자활촌 같은 경우는 60년대에 집단이주정책이 이루어졌어요. 그때당시만 하더라도 이쪽에는 허허벌판였거든요, 황무진데 주로 충남쪽의 논산사람들이나 연산사람 등 그 사람들이 이제 강제 이주가 됐어요. 지금의 자활촌과 신흥리 마을쪽에 그사람들은 이주시켜 가지고 재건촌을 형성하게 됐어요. 재건촌 그게 이제 의미가 승계되면서 자활촌이라고 명명이 되면서 60년대 이후 향촌이 생겨진 그 경우라서 역사성은 크게 없어요.

  그래서 그것이 신흥리 마을이라든가 자활촌마을이 흑사평은 펄판이에요. 원래이름이 흑사평이에요. 척산마을은 그렇게 설명이 되고 노리마을은 역사성을 갖고 그 다음에 도리원리와 이목리 같은 경우 배나무골이라든가 복숭아 주로 과수원이 많이 형성되었던 지역이예요.

  지금도 가보게 되면 도리원이라든가 이곡리쪽은 좀 덜한데 인곡쪽에는 과수원이 많아요. 그쪽에 과수원마을들이 많아 있어 가지고 전반적인 노학동의 명칭에 대한 연혁은 그렇게 되요.

<김철환, 남·37, 노학동, 1999. 11. 20>


45. 귀면암과 마고선

  귀면암(鬼面岩)이라 하면, 귀신 귀, 낯 면, 바위 암자, 그 천불동 중 허리에 자리잡고 있는 데가 귀면암이죠.

  귀면암이라 하면, 천불동(千佛洞)중허리인데, 이 밑에서 보통 따지자면 와선대(臥仙臺)라고 하는 데는 예전에 그 송림(松林)이 울창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데인데, 예전에 마고선(摩姑仙)이라는 선인이 많은 선인들과 같이 그곳에 와서 바둑과 거문고를 타며 산수의 경치와 아름다움을 누워서 감상하던 데라고 해서 그대로 누울 와, 신선 선, 집 대자, 와선대라고 불렀습니다.
와선대로부터 한 300m 올라가면 마고선인이 하늘로 동천했다고 해서 날 비, 신선 선, 집 대자, 비선대(飛仙臺)라고 불리어 왔죠. 비선대는 예전에 시인의 발걸음이 끊어질 사이가 없어 시인이 들어 와서, 시도 짓고 이름도 새기고 나갔습니다.

  예전에 어느 시인 한 분은 그곳에 와서 맑고 구슬같이 흐르는 물에다 발을 담그고, 반석 위에 비스듬히 누워서 하늘을 찌를 듯한 장군봉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바우와 바우 사이에는 자기 뼈마디 같이 살아나는 듯하여, 날개라도 있으면 하늘로 날아갈 기분이라고 했으니 비선대 장관이야 뭐라고 나무랄 바가 없다고 합니다.

<유만석, 남·50, 설악동, 1981. 4. 17>


46. 금강굴 도승의 욕심

  비선대에 올라가니까 옛날에 금강굴이라 해서 올라갔더니 거기서 스님이 역사라 해서 얘기해 주는 걸 들었어요. 어느 스님이 도를 닦느라고 그 굴속에 들어가 앉자있으니까 자기가 가지고 간 건 없구 먹을 건 없구 이래서리 그러니 앉아서 기도만 드리고 앉았더라니까.

  하루 세 끼다 쌀하고 물이 똑똑 조금씩 떨어지는 걸 가지구 그 쌀을 씻어가지구 밥을 해먹구 밥만 먹구 거기서 기도 드렸노라고 역사를 얘기해 주는데, 그 스님이가 도중에 이랬답니다.

  “야, 이거 힘들어 죽겠는데 삼 시 세끼 기도 드릴라 밥해 먹고 삼 시 세끼 기도 들일라니 힘이 드니 쌀을 좀 한꺼번에 주지.”

  왜 한번 기도 드리고 아침 새벽기도 드리고 일어나면 딱 한 사람 먹을 쌀만 나오고 굴속에서 그랬는데, 또 한번 기도 드릴라니 청수하고 먹는 쌀만 나오고 이래니 공양 지어먹다 보니까 기도 드리는 기 영향이 있을까봐.

  “한꺼번에 나오지 왜 세 번에 꺽어 나옵니까?”

  이랬더니 쌀이 그 이튿날부터 하나도 안나와서 벌을 입었다는 그런 역사가 있다는 그 전설을 그 스님이가 얘기해 줍디다.

<박삼손, 여·63, 설악동 2/3, 1992. 3. 26>


47. 권금성과 토왕성

  권금성은 하나의 완전한 그 연대라든가 축조에 대한 기록이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문헌에도 보면 전설에 의해 가지고 작성된 것이라고 봐지고 있구요. 확실한 거 언제 어느 연대에 누가 어떠한 목적으로 축성이 됐다 하는 것은 명확하지 못합니다.

  저희들이 듣고 있는 바로서는 전설적인 얘긴데 우리가 문헌에서 보면은 성종 21년 정도가 아니냐. 이렇게 대충 보고 말하는데 그 당시에 그 중국병이 이쪽을 침입했을 때, 그때 이쪽 지역의 사람들을 피난시키기 위해서 그거를 축성했다 이렇게 대략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마는, 그런데 거기 따르는 구비전설로서 내려오는 전설을 보면은 권장사와 김장사가 성을 축조했기 때문에 권금성이다, 이렇게 명명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전설을 이렇게 들어보면은 권장사와 김장사가 한 동네 살았는데 이 사람들이 중국병들이 몰려오니까 가족을 데리고 피한다는 것이 사세는 급하고 그때만 해도 어데 피한다는 것이 깊은 산,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가지구 피난하는 수 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지금의 현재의 권금성 자리에 올라가서 보니까 성이 없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아, 적병은 뒤에 뒤미쳐 따라오구 이 성이 없으면 도저히 방어할 길이 없다. 그래 둘이서 난감한 처지에 놓였는데, 그래 둘이서 의논한 끝에,

  “자, 이거 성을 쌓자.”

  그런데 성을 쌓을라니 산에 성을 쌀만한 돌도 없다는 얘기죠. 그러면 아래 대림천에 내려가 가지고 거, 대림천 돌을 주워서 올려 가지고 성을 쌓아야 되는데 한 10리길 되는데 그럼 등짐으로 져 나른다는 거는 며칠을 쌓아도 성 하나 쌓기 어렵다는 얘기죠. 그래서 그럼 이걸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래서 이제 권장사가 한참 생각하다가 그 김 장사를 보고하는 얘기가,

  “이렇게 합시다. 이거 도저히 말이지 뭐, 돌을 져날라 가지고 성을 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또 그만한 기간적 여유도 없다. 그러니 할 수 없으니까 내가 내려가서 개울에 내려가서 말이지 돌을 주워서 던질 테니까 당신은 여기서 받아서 성을 쌓으시오 말이야. 그러면 우리 하룻밤 사이에 성이 다 쌓으겠소”

  “좋습니다.”

  이렇게 되었어요. 그래 권장사가 먼저 내려갔어요. 개울에 돌을 주워서 던집니다. 그러면 이제 김장사가 거 위에서 돌을 받아 가지고 성을 쌓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 인제 한밤중까지 권장사가 하고, 그 다음에 인제 교대로 해서 김장사가 내려가고 권장사가 위에서 돌을 받아 쌓고 이래서 에, 그 성을 쌓았다. 이런 전설이 있는데, 지금 현재 성의 높이를 우리가 본다면 높이가 약 4척입니다. 둘레가 천 백 열두자 이렇게 그 성이 됩니다.

  그러면 이것은 고 옆에 보면은 토왕성이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토왕성하고 권금성하고는 상당히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냐. 근데 그 어느 문헌에서 보면은 이 억압지세에 순치지형이라 하는 이런 말이 있어요. 이를 탁 다무는 것에서 탁 미치는 것 그러한 형국이다.

  그러니까, 인제 토왕성과 권금성하고 연관을 해서 말하는 것이 고런 말이 나오는데 그러면 억압지세에 순치지형이라 하는 말은 고, 저 권금성하고 토왕성하고 이것을 연관된 어떤 거 말이 아니냐. 그렇다면 하나의 이 어떤 지형적 말을 내포한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완전히 저희들이 보는 바로서는 완전한 성 하나의 방어용으로서 축성이 됐다. 지금 이렇게 보고 있는데 여기에 대한 기록이 정확한 것이 없기 때문에 저희들 자신이 고증해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없지마는 대개 고로한 방향에서 말이 나옵니다.

<장헌영, 남·54, 중앙동, 1981. 4. 27>


48. 권금성과 달맞이꽃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에 삼국시대 때 고구려, 고구려 보장왕을 왕으로 올려 놓고 연개소문이 정권을 손아귀에 놓고 정권을 해 가는 무렵이었어요.
그때 당시에 그 권씨, 김씨 양 장군을 역적으로 몰아서 역적으로 몰은 적이 있어 가지고 그럼 그분들이 고구려 역적으로 몰았으니 붙잡히면 죽을 꺼고 그러믄 신라로 도피를 해 가지고 신라에 와서 저 권금성이라고 하는 저 산 꼭대기 해발 860m 정상에 올라 가서 거기서 인제 그 권, 김 양 장군이 두 아들을 데리고 난세를 피하기 위하여 성을 축소하고 난을 피하고, 난세를 피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부하들을 시켜 가지고 저 정구평을 지나면 촛대바위라고 있습니다. 촛대바위라고 하는데 거기는 봉화대, 그 봉화대를 일러서,

  “이 골을 수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봉화불을 올려라.”

  그게 전화보담 빠르지요. 그래서 거기 봉화대로 한 때는 불려 오고 그 군량장이라고 하는 데는 군량미를 갖다 저장하고 군량미를 저장해 가지고 그게 인제 권금성으로 쭈욱 올라가고 금강굴에도 그 금강굴이 결과적으로 마적굴이라고 마적굴이야. 마적단이 있는 굴.

  그 양양고을 원 이도은씨가 그 원을 할 때 양양 고을을 털어다가 군량미를 갖다 저장해서 권금성을 올리고 금강굴로 옮기고 그러면서 난세를 피하고 그 난을 우리나라에 들어와, 권금성에서 난을 피했다고들 합니다.

  그때 당시에 그 내려오는 전설이지만 그 권장군이라는 그 장군은 그 부근에 그 막사 부근에 어느 여인이 나타나서 낮에는 나타나지 않고 밤에만 나타나서 이렇게 뱅뱅 돌고 돌아댕겨. 권금성으로 돌아댕기면서 그 사랑을, 마음의 사랑을 하면서 돌아 댕기는데. 그 낮에는 어디 풀 속에 숨었다가 밤에는 저녁마다 그렇게 아주 쉴새 없이 매일 빠짐없이 비가 오나 그저 언제든지 이래 돌아 댕기다가 결과적으로 지쳐 가지고 그래 그 이튿날 아침에 그 부하들이 와서 대장한테 문안드릴려고 와 보니 웬 여인이 하나 죽었거든. 그 여인은, 대장이 하는 말이,

  “그 여인은 저 풀속에다 갖다 묻어라.”

  그 여인을 풀 속에다 갖다 묻었는데 그 묻은 자리에서부텀 그 웬 풀씨가 나와 가지고 거름이 되어 가지고 잘 커 올라오더니 그래 인제 꽃이 밤에 피었다가 낮에는 지고 노랗고 좋은 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에 와서 달맞이꽃이라고 해서 달맞이 꽃은 낮에는 피지 않고 밤에 피어가지고 밤새도록 반기다가 낮에는 시들어지는 게 달맞이 꽃이, 그래서 달맞이 꽃이 생겼다고 합니다.

<유만석, 남·50, 설악동, 1981. 4. 17>


49. 금강굴 유래

  전에 보니가 원효대사가 금강굴에서 수도했는데 금강경을 만들었다. 금강경 원문 속에 금강이란 말이 있기 때문에 이 굴을 금강굴이라 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걸 부인합니다. 왜냐하면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계조암에도 와 계셨고 선정사에도 와 있었고 신흥사지에 다 나와 있습니다. 만약에 금강굴에 와 계셨다면 그걸 빼놓을 리가 없습니다. 금강굴이란 것은 금강(金剛)이란 불교적으로 해석해 놓은 게 있습니다. 뭐라고 해석해 놓았는가 하니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진짜 완전한 것이다.”

  그래서 제석천(帝釋天)이란 부처님이 짚고 댕기는 지팡이를 금강이라 한다. 지팡이다. 제석천은 누구냐? 관음보살이 변신한 것입니다. 관음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자기 응신술, 저쪽에서는 동자로 나타나고 저쪽 가서는 대장으로 나타나고 이런 것이 서른 세 가지가 있답니다.

  나는 불교를 잘 모르지만 서른 세 가지란 것은 엄연히 사전에도 나와 있습니다. 제석천이 가지고 있는 지팡이다. 결국은 관음보살이다. 그럼 왜 지팡이를 가지고 있나? 그 지팡이를 가지면 모든 사악들이 범접을 못한다. 그런 무기다.

  지금 금강굴 옆에 봉정암 쪽으로 가는데는 금강문이라고 있습니다. 또 금강산에도 금강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금강산도 원효대사가 지나갔다고 해서 금강문이라고 짓지 않았습니다.

  또 여기도 마찬가집니다. 왜 금강굴이라 하면 그와 같은 제석천이 지팡이를 가지고 있으니까 모든 것이 잡귀가 못 덤벼든다. 이런 얘깁니다. 그러니까 이 금강굴은 높고 험하고 아주 깍아진 곳에 있으니까 모든 것이 거기에 올 수 없다. 그겁니다.

  진수 중에 진수다. 누가 범접할 수 없다. 그래 금강 거기서 공부를 하면 도통이 잘된다. 득도가 쉽다, 그래서 이름을 금강이라 부쳤다. 그래서 금강굴이라 합니다.

  원효대사가 있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원효대사가 금강경을 지은 것이 아닙니다. 금강경을 알기 쉽게 하기 위해 금강소란 것을 지었습니다.

<박익훈, 남·77, 교동 1992. 4. 21>


50. 소야팔경(所野八景)

  소야팔경은 뭡니까. 처음에는 기록을 찾아내지 못해서 떠도는 얘기를 가지고 ‘속초귀범’(束草歸帆)을 ‘조도귀범’(鳥島歸帆)이라고 했습니다. 그건 틀린 얘깁니다.

  내가 박한영이란 사람에게 들은 얘긴데 그 분은 ‘척산야침’(尺山夜砧)이라는 말도 한다고 했습니다. 척산의 밤에 들리는 다듬이 소리가 하나 더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조도귀범이 아니고 ‘속초귀범’이라 이런 얘길 합니다.

  내가 무슨 근거를 찾기 위해서 그 속초시장하던 김명환씨 형님인 김종환씨라고 저와 친한 사람이 있어요. 그 분 아버지가 도천면 시절에 이장을 했습니다. 이장을 했기에 『면세일반(面勢一班)』이란 게 그 집에서 나왔어요. 거기에 소야팔경이 아주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창흡(金昌翕)이란 이가 지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없고 어떤 분은 김시습이 매월당 그 양반이 부월리에 와서 움집을 짓고 살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김시습은 일정한 장소 없이 사방에 돌아다닌 분이었고 김 삼연(三淵)선생은 주로 영시암에 근거를 두고 있었는데 영시암은 인제군의 백담사 위에 골짜기에 들어가면 거기 있습니다.

  내가 “영세 불출세(永歲不出世)”라 하여 여기 들어와서는 영원히 죽을 때까지 안나가겠다고 했는데 나중에는 범이 자기 식모를 잡아먹어 가지고 다시 춘천방면으로 갔다는 그런 게 있는데.

  그러니까 김삼연이 거기 와서 놀은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전에 청초호 옆에 청초정이란게 있었답니다. 김 삼연 시절은 지금 보담 숙종때니까 한 3백년 가까이 안됩니까? 3백년전에도 그런말이 있었는지 모르나 여기 와서는 놀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추측되지요.

  그래서 김 삼연이 그것을 지었다는 것은 그것도 믿을 수 없고, 김시습이 그것을 지었다는 것도 믿을 수 없고, 이 지방 시인들이 모여서 놀다 보니까 그런 팔경을 만들어 냈지 않나 합니다. 이 소야팔경은 소야를 중심으로 했는데 주로 청초호를 중심으로 해서 나온 글입니다. 왜냐하면 8경을 보면 청초호가 6경인가 있고 저쪽엔 2경밖에 없습니다.

  처음에 노동명월(蘆洞明月), 갈대꽃이 많이 피었는데 그 위에 달이 환하게 비치니 그게 참으로 보기 좋거든요. 노동(蘆洞)이란 동네가 노학동이지요.
그 다음에 이동백설(梨洞白雪)이 있어요. 여기에 이동(梨洞)이란 동네 뱃골이란 곳이 있는데 배나무 오얏나무가 얼마나 많았는지 그런 일이 있었지요. 왜정때에 몰지각한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서 그 경치가 없어졌다고 그 부락에 가면 얘기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청대화병(靑垈畵屛), 청대리라는 그 뒤에 산이 있는데 그게 청대산인데 청대산을 여기서 바라보면 병풍그림같이 아름답거든요. 그런 것을 누가 베었다 하여 역부로 찾아 올라갔더니 바람이 불어서 쓰러졌습니다. 화병은 그림 화(畵)자, 병풍 병(屛)자, 청대산의 모습이 그림을 그려놓은 병풍같이 그렇게 아름답다. 청초호에서 본 것이지요.

  다음에 주교야화(舟橋夜火)인데 주교리에서 밤의 게잡는 불꽃이 보기 좋았던 모양이예요. 지금 오징어잡이 배가 저기 나가 있는 걸 보면 서울사람들이 와서 보고

  “야, 속초가 굉장히 크다. 여기도 전기불 있네, 저기도 전기불 있네”

  그러지요. 주교(舟橋)는 옛날의 부월리(扶月里)를 주교리라 불렀지요. 배다리 동네라고 불렀어요.

  그 다음에는 논산조양(論山朝陽), 논산이 속초에서는 그래도 제일 높은 곳이지요. 높아서 해가 뜨면 어디보다도 거기에 먼저 비쳤다 해서 논산에 아침 해가 비치는 광경이 아주 아름답다.

  그 다음에는 속초귀범(束草歸帆), 속초에서 고기 잡는 배가 원포귀범(遠浦歸帆)이라고 소상팔경에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속초에서 보면 배가 돌아오는 것이 참 해는 저물고 석양빛을 받아서 돛대를 달고 돌아오는 게 너무 아름다워서 소상팔경 하나인 원포귀범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아름답다고 해서 그런 것이 있어요.

  다음에 청호마경(靑湖磨鏡), 청초호수는 얼음이 얼면 마치 유리거울 같이 맑갛게 그렇게 보였다 해서 거울을 갈아놓은 것과 같다. 갈 마(磨)자, 다음에 온정조하(溫井朝霞)라 이러는 데 온정의 아침 노을, 그건 뭔고 하니까 지금도 온정에 거기서 더운 물이 나온답니다.

  옛날도 물이 뜨시기 때문에 겨울아침이 되면 거기서 인제 수증기가 올라가서 거기서 발산하여서 속초 이짝에까지 전부 설악산에 구름 끼듯이 수증기 안개 같은 게 그렇게 아름답게 끼었답니다. 그래서 온정조화라 부른답니다.

<박익훈, 남·77, 교동, 1992.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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