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비문학 4

관리자
202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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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장천 유래

  장천리(獐川里)는 500년 전쯤부터 있었다고 해요. ‘노루 장(獐)’은 마을 서쪽 원암리(元岩里)로 넘어가는 노루목 고개에서 유래한 것이예요.

  마을 앞 냇가가 노루목 고개에서 시작되어 흐름으로 노루내라고 하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장천(獐川)이라고 한 것 같아요. 그후에 지금부터 70∼80년 전에 엄씨 가문에 진사가 나자 마을 이름에 ‘노루 장(獐)’자가 있는 것이 노루가 있으면 재수 없다고 해서 ‘노루 장(獐)’을 ‘글 장(章)’으로 바꿨다고 전해와요.

<어재동, 남·58, 장천마을, 1999. 12. 1>


32. 장재터 이야기

  옛날 이 지역에 장재라는 아주 유명한 부자가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날 그 부자의 집에 스님이 찾아 왔는데, 그 스님을 그냥 돌려 보냈데요. 그 스님이 화가 나서 돌아간 후 비가 아주 많이 내려서 그 부자의 가족과 집, 그리고 가축들이 모두 떠내려 갔다고 하데요. 이 마을 뒷산에 아직도 장재라는 부자가 살았다는 집터가 남아 있는데 몇 년전에는 거기서 장재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도 나왔다고 해요. 그로 인해 그 마을이 지명이 장재터가 되었다고 합니다.

<서갑수, 남·61, 설악동, 1999. 12. 6>


33. 장천마을의 음양수

  이 마을 뒷산우물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와요.

  물에도 남자와 여자가 있다고 해요. 여자물은 맑고 남자물은 뿌옇다고요.

  한 우물은 맑아서 여자샘이라 불리며 또 하나는 남자의 샘이라 해요. 우리 나라 전통 사상에는 모든 사물이 음과 양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물에도 이와 같은 이치가 적용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어재동, 남. 58, 장천, 1999.12.1>


34. 장천마을의 인심

  장천마을에 아홉해 동안 흉년이 들던 시절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거지나 다름없이 유리 걸식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1년만 흉년이 들어도 소작농들에겐 어렵디 어려운 한해가 될 수밖에 없는데 9년간이나 이어졌다고 해요.
마을에 큰 부자집이 있었지요. 아무리 흉년이라해도 며느리가 친정에 가는데 떡은 해가야 하므로 두 세 가마나 들여 떡을 만들고 있었데요. 그것도 가을이 아닌 봄(보릿고래)이었다고 해요.

  그때 산에서 아기를 낳고 허기가 져 아기가 강아지로 보이고 요강이 가마로 보여 아기를 삶아먹었다고 하는 미친 거지가 그 부자집을 지나다가 떡을 치는 것을 보고 그 떡에 달려가 넙쭉 엎드려버렸다고 해요.
그 거지 몸에는 이가 많았는데 그래서 그 떡을 사돈집에 보낼 수 없게 되었다고 해요. 또다시 두 세 가마를 들여 떡을 만든 후 사돈집에 보내고 더러워져 버린 떡은 모두 그 거지에게 주었다고 해요. 때려죽여도 마땅한 그 거지에게 말이지요.

  그 어려운 시절에도 자기보다는 사람을 중히 여겼다는 이 마을의 구수한 민담이 마을에 전해내려 온다고 합니다.

<어재동, 남·58, 장천, 1999. 12. 1>


35. 청대리 소나무

  옛날에 청대리에 큰 소나무가 있었어. 웅장하고 굵기도 크고 가지가 많은 소나무여서 사람들은 그 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기고 제사도 드리고 가축을 죽여 재물로 바쳤지.

  헌데 한 사람이 그날 기분 나쁜 일을 당해 술을 먹고 만취해 그 소나무가 서 있는 길을 가다가 뭔가 앞을 막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는 도끼로 그 나무를 한번 내려치니 그 나무는 천둥번개와 함께 울부짖는 소리를 내면서 쓰려졌어.

  그 소리에 놀란 그 사람은 도끼를 던져 버리고는 황급히 집으로 달아났는데 그 다음날 그 나무를 벤 사람은 갑자기 벼락을 맞아 죽어버리고 한동안 청대리에는 불행이 찾아 왔다고 전해. 그 후로 몇 년의 세월이 흐르고 불행이 멈추었다고 전하지.

<장명석, 남·56, 조양동, 1999. 12. 7>


36. 청대리의 전설

  청대리는 속초에서 조양동에 속해 있으며 청대산(해발 230m)을 끼고 있는 마을이예요. 이 마을은 다른 마을들과는 달리 남향이 아닌 북향을 하고 있어 아주 특이한 곳이라 할 수 있지요.

  원래 청대리라는 이름은 6·25사변 당시에 불렸던 이름이고 지금은 조양동이라고 불려져요. 청대리라는 말은 최근 들어 잘 사용하지 않아요. 청대리에는 보기 드물게 아직도 상례를 치르는데 마을이 그리 크지 않고 동네 사람들이 서로서로 알고 지내기 때문에다 같이 슬퍼하고 상을 당한 가족도 위로해 주는 인심 좋은 마을입니다.

  이 마을의 전설로 살인재는 나중에 싸리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어요. 이 살인재는 고개 이름인데 이곳에서 산적들이 지나가는 상인들이나 행인을 습격해 물품을 빼앗고 살인을 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요. 나중에는 전쟁시 왜군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그곳에서 많은 살인이 있었고 그 때문인지 원한을 가진 귀신들도 나왔다는 소리도 있어서 그곳을 사람들은 잘 왕래하지 않았고 산적들도 다른 곳으로 떠났다는 소리가 있어요. 지금은 싸리재라고 불리우고 싸리재 중간에 약수터가 있어 사람의 왕래가 많아요.

  송장골은 싸리재에서 죽은 사람들을 묻어둔 곳이라고 전해요. 예전에는 무덤과 시체들이 많아 가끔가다 곳곳이 무덤이 있고 사람을 한꺼번에 묻은 흔적만 있다고 해요. 지금은 그곳은 등산로로도 쓰여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데 옛날에 이곳 역시 귀신이 나와 사람을 해 하기도 했다고 전해와요. 싸리재에서 아무 이유없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혼이 떠돌아다닌다고 전해지고 있어 이 때문에 이름도 송장골이라고 붙여졌다고 합니다.

  아랫고개는 옛날부터 무서움의 대상이기도 했던 곳이예요. 어디서 유래되어 나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곳으로 상여가 지나가면 마을에 큰 재앙이 닥친다고 하여 그 고개로 가지 않고 빙 돌아서 나갈 정도로 무서운 길이었어요. 그 이유로 사람들은 그 길을 지나가는 것을 꺼려했는데, 한동안 그랬었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요. 하지만 지금도 상례는 그곳을 지나가지 않는다고 전해요.

<장명석, 남·56, 조양동, 1999. 12. 7>


37. 미시령 전설

  미시령은 월래는 옛날에는 미시타령이래요, 아득할 미, 화살 시(矢) 자가 아니라 때 시(時)자래요. 그건 뭔고 하니 아득한 시간이 걸려야 그 재를 넘어 갈 수 있다. 그 말이래요.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그 내력을 모르니까, 요즘에 와서 미시 이게 활에 관한거다 하는데 이건 잘못된 거래요. 미시령은 때 시자다. 미시령은 본래는 대관령도 그렇고 무신 재든 간에, 재 밑에는 역이 있어요, 역마을.

  지금 우체국 같은 거. 통신 역할, 물건을 운반하고. 그러면은 역에는 사람이 타는 말이 있고, 짐싣는 말이 있거든. 역이 크면 클수록 말이 많지요. 근데 미시령 밑에는 원암역이 있었어요.

  원암역에 대해서 이런 말이 있어요. 그 원암역은 고려에는 장천리에다 역을 만들려니까, 장천리 사람들이 반대했다 이거예요. 역사람이란 상놈이다 이거요.

  옛날엔 양반이 사는 동네에 어떻게 역을 만드냐 안된다 이거야. 김진사란 진사가 장천에 났대. 진사 같으면 생원인데 양반이지. 진사난 마을에 양반마을에 우예 짓냐말이지. 그래 할 수 없이 원암이란 데로 옮겼어. 원암 이 미시령 밑에. 그 원암역에 가면 서낭봉이란게 있어요.

  동네한 복판에 큰 능같이 되있어요. 근데 그걸 서낭당이 있다고 해서 그 봉을 가보면 마을 한 복판에 어디서 왔는지 묘겉이 생겨서. 그것이 서낭봉이다 이거지. 그 서낭봉은 미시령을 넘어가는 사람은 반드시 서낭당에 와서 제사를 올리고 넘어가야 무사하다 이거야.

  왜 그런고 하니 옛날 도적이란게 있었어요. 산 꼭대기에 있다가 사람이 짐 싣고 지나가면 장사꾼같이 물건 뺏기고 죽이고 그러지. 그다 제사를 지내고 가야 무사하다. 하. 그래서 서낭봉.

  그리고 미시령 꼭대기 다 갈 무렵에 얼마 안 남겨 놓고 왼쪽으로 촛대겉은 바위가 아주 묘하게 생긴 게 있었어요. 그바위를 우리말로 잘 바위라 하고 한문은 숙암이라고 해요. 왜 그런고 하니 옛날에 재가 험하고 기니까 사람들이 거서 자고 갔대.

  거기에 주막이 있었지. 그 넘에 넘어가면 도적소란 게 있어요. 지금은 산비탈로 길이 났지만 옛날에는 골짜기로 댕겼다 이거야. 고 밑에 도적소에 가보면 그 밑에 길이 조그마난 게 있는데, 그 밑에 물이 흘러가는 조그마난 폭포가 그 밑에 있다. 도적놈들이 고 밑에 기다리고 있다가 사람들이 지나가면 물건 뺏고 돈 뺏고 그 소에 집어넣어 죽였다. 그래서 도적소라.

  그런가 하면 미시령에 대해서 맨 꼭대기에 가면 미시령이라는 이승만 대통령 휘호가 있어요. 거기엔 미시령이라고 역시 화살 시(矢)자로 되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대통령이 화살 시자로 써놨는데 왜 때 시(時)자라고 하느냐 하는데 어찌 대통령이 대한민국 팔도강산을 다 아는고? 여기 사람이 그렇게 써 올렸기 때문에 그렇게 썼지. 대통령이 알아서 쓴게 아니거든.

  그 잘못 써 있지. 이박사 호가 우남이거든. 그 앞에 써 있지. 근데 그게 또 재미있는 얘기가 택당 이선생이 쓴 것에 여기에 가면 영랑호 저쪽으로 간성군 토성면이 있는데, 토성면에 애남이란 백정이, 여기에 영월 넘어 가가지고 너무 험해가지고 못 다니니깐. 미시령, 그때는 오색령, 지금 그러니까 한계령으로 넘어 다녔거든.

  그 한계령을 양양사람은 오색령이라 하고 인제 사람은 한계령이라 하고. 왜 그런고 하니 양양사람은 오색이라 하냐면 한 나무에 오색꽃이 핀다고 하는데 그건 틀렸고. 거기에는 돌에 오색이 많다고. 그래서 충청도 보령에 가면 비가 있어요. 그 비문에 뭐라 써있냐 하면, 오색 골짜기에는 돌이 오색이다. 그걸 비문을 못 본 사람은 나무에 오색꽃이 핀다고 잘못된 얘기를 한다니까.

  오색령에서 인제쪽으로 흘러가는 물을 한계천이라 하거든 한계리에 있다 해서 한계령이다. 그래 길을 닦을 때 군인 둘이 저쪽에서 와서 닦으니 한계리만 알았지. 이짝에서 오색이란 것은 몰래. 근데 거기에 옛날에는 공무원들이 한계령을 넘어서 이쪽으로 오색으로 왔거든. 그사람들이 잘데가 어디가 자냐. 그래서 역이란 공무원 뭐 이런데 대해서 필요한 게지. 그래 말도 암행어사 마패가 있는데. 그건 신분증이래. 토성면 사람이 백정 되는 사람이 장사하러 갔다 말이지. 여기서 해산물 사가지고 그 미시령을 넘어서 저쪽 가가지고, 영서지방에다가 팔고 판 돈으로 곡식을 사가지고 넘어왔지.

  물물교환, 그러고 오는데 곡식을 말띠에다가 싣고 오는데 눈이 많이 왔어 통고지설(通高之雪), 통천과 고성사이에는 눈이 많이 온다. 양간지풍(襄杆之風)은 양양과 간성사이에는 바람이 세다.

  그도 택당이 써 놓은데 보면 그 바람이 천후산에서 나온다. 그래서 바람이 세다 이거야.근데 백정이 넘어 오는데 눈이 와 놓으니까 오기 힘들꺼 아냐. 오다가 눈사태를 만나 가지고 아들이 말과 함께 구불었네. 아버지 혼자 아들을 구할 재주 없지. 그 할 수 없이 집에 혼자 돌아왔다. 그래 집에서 죽은 혼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고 송장을 찾으러 인제 눈이 좀 녹아서 아흐레 지나서 갔단 말이지. 가 보니까. 눈이 좀 녹아서. 아들이 구불어 간 자리 이래 가 보니까 이만한 구멍이 하나 있더래요. 그래서 구멍을 보니까 뭔가 그 안에서 소리가 나는 것더래요.

  그래서 애남아… 애남아… 하고 부르니깐. 대답을 하더래요. 그래서 이야 애남이 죽은 귀신이 저기 있다. 이 아무도 구멍에 대고 얘기 할라 하지도 않고, 들어 갈라 하지도 않더래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가서 니 애남이 맞나? 맞다이기야. 그럼 애리 내 보이더래요. 아 맞다. 그래서 파고 들어가니까 살았더래요. 그 어째 살았느냐 하니 이 놈이 말하고 같이 구불었는데 말은 간 곳 없고 어디간 데 없고 안장하고 같이 구불었다. 바위가 이마한 게 있는데 그게 바위 위에 탁 걸렸네. 공간이 생겨가. 눈이 와도 그 속에 들어가서 있으니까 죽지않고.

  “그래 안춥드나?”

  하니 눈속이라 안춥드래요.

  “뭘 먹거 살았느냐?”

  하니 말 안장 가죽을 뜯어먹고, 물은 눈을 먹고 살고 그걸 사실 그대로 써 놓은 게 있어요.

<박익훈, 남·84세, 교동, 1999. 12. 1>


38. 만천동 유래

  교동 쪽은 옛날에 만천동이라고 했어요. 그 동의 이름은 이쪽에 만석군이 살고 있다 그래서 만천동이라 한다고. 그리고 예전에 여기에 샘이 하나있었으므로, 그래서 샘천(泉) 자를 쓰기도 하고, 일 만(萬) 자에 일 천(千) 자를 써서 만천동이라고 하고, 유래 또 한가지는 집이 한 만천호가 된다 해서 동을 명칭을 한 게 아닐까 해요. 아마 추정을 한 것이 이쪽 동리에서는 요충이 될만한 지역이 아닌가 해서 만천동이라 하기도 하고, 만석군이 살고 있었다해서 만천동이라고 하기도 하고, 다른 일설에 의하면 샘천(泉) 자를 써서 늘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었다 그런 뜻에서 동네 명칭을 만천동이라 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동제실시 이후 동 명칭을 교동이라 명명한 게 이쪽의 지역의 특성상 학교가 많아요. 예를 들어 강릉 같은 경우 흔히들 교동이라 부를 경우 그쪽 지역에 향교가 있을 때 그 동네들 교동이라 명칭을 하죠. 우리 속초에서 아직 향교라든지, 유림이라든지 하는 뿌리깊은 것은 없어요. 다만 학교가 밀집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런 도시적 특성 때문에 교동을 학교 교(校)자를 써서 교동이라 명명을 붙인 건 있어요. 작년 10월 달에 각 동 동·폐합 관계로 노학동 전체지역과 교동 일부지역을 합쳐서 노학동이라 명명을 했거든요. 그래서 동 명칭에 대한 유대관계는 오히려 지금단계에서는 이 지역에서 어떤 역사성을 찾는다면 별 의미가 없어요.

<김철환, 남·37, 노학동, 1999. 11. 20>


39. 비룡폭포와 처녀제사

  인제 비룡폭포 쪽으로 보면은 아주 폭포가 320m가 되는 폭포가 하나 있는데 그 폭포 뒤에는 칠성봉이라는 봉우리가 하나 있어요. 칠성봉 그 칠성봉에는 그 밑으로 내려오면은 커다란 폭포가 그 전에는 신방폭포라고도 불려 왔는데 요 근년에 와서는 토왕성폭포(土旺城瀑布)라고도 하지요.

  토왕성폭포는 지난 날에 이태백이가 중국 연산폭포를 연상케 하고 개성 박연폭포를 거쳐 금강산의 구릉폭포를 거쳐 가지고 이 토왕성폭포로 왔습니다. 토왕성폭포를 와 보니

  “과연 거대한 폭포다. 이 폭포에 시를 하나 지어 놔야 되겠다.”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

  떨어지는 물은 삼 천 자요.

  ‘의시은하낙구천’(疑是銀河落九天)

  또한 떨어지는 물은 은하수에 비치어 구천에 떨어지는 것으로 의심된다. 이렇게 폭포의 장관을 멀리서 바라볼 때는 하늘에서 흰 비단을 걸쳐놓은 것 같고 가까이 서 볼 때는 꽃 구슬을 석벽(石壁)에 박아 놓은 듯한, 사철 변함없이 쏟아져서 오고 가는 나그네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데가 바로 토왕성폭포입니다.

  토왕성폭포에서 약 2km를 내려 오면 하폭으로서 비룡폭포(飛龍瀑布)라고 하는 관광코스가 지금 되어 있는데, 폭포가 하폭이 하나 있습니다. 그 비룡폭포의 전설을 보면 그전에는 비룡폭포라고 그 이름도 붙어 있지 않고 무명폭포로 이름도 없는데 행정 구역상 도천면이라는 데가 양양군 도천면, 속초가 도천면이예요.

  양양군 도천면 향성리(香城里) 또 때로는 도문이라고도 했지만 향성리라고 해요. 향성리로 행정구역이 있는데 그 향성리에는 농사가 잘 되고 부촌들이 기와집들을 많이 가지고 있고 지금도 기와집들을 많이 가지고 부자로 살았는데 천불동 계곡물은 다 말라도 이 토왕성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은 마르지 않아 가지고 이 물루다 이용해서 농사를 짓고 이 물루다 이용해서 농사를 풍년으로 다 그렇게 지었어요.

  그래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사는데 한 해는 가뭄이 왔어요. 가뭄이 와서 밭에 곡식이 타 죽어, 논에 벼 심어 놓은 것이 말라죽어. 그러니 동네 사람들이 아우성이지요. 일거리가 없습니다. 가물면 할 게 하나도 없지요. 그러니 모여 앉아서 웅성웅성 맨날 모여 앉아 아우성인데, 그래 부락 사람이,

  “어디 그러면 우리 한 번, 그 계곡에 한 번 올라가 보자. 그 계곡이 어떻게 됐기에 거기 물이 안 내려 오느냐. 그 큰 개울물이 말라도 거기 물은 언제든지 끊어지지 않고 물이 흘러 내려 왔는데, 거기 물이 안 내려오는 이유가 뭔지 어디 한 번 올라가 보자.”

  올라가 쭉 올라가니 물이라곤 구경할 수 없는데 지금 비룡폭포 꼭대기 그 선녀탕 그 사람이 많이 연연히 빠져 죽는 선녀탕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막아 놔서 들어가지 않는데 그전엔 막기 전엔 많이 죽었어요. 사진도 찍다가 죽고……. 거기 그 웅뎅이 밑은 물이 고여 있고 그리고 그 뒤에 물 떨어지는데 벽에 떨어지는 게 고 웅뎅이 마르지 않을 만큼만 물이 떨어지는데 고 올라 가면 뒤에서 내려 흐르는 물이 없고요. 하두 이상해서,

  “그래, 그 웅뎅이에 괴물(怪物)이 있구나.”

  그래 괴물이 있다는 걸 알고 조금 올라가 보니 개울물은 말라 있는데, 쭈욱 올라가니 그 지금 폭포, 비룡폭포라고 하는 그 웅뎅이만은 물이 고여 있어요. 딴 데는 물 구경을 할 수가 없는데.

  그래 그 꼭대기에서도 올라가 보니 그 꼭대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것도 없고 한데 이상하게도 그 웅뎅이 마르지 않을 만큼 거기서 폭포에서 물이 떨어져 그 웅뎅이가 고여 있는데, 그래 그 꼭대기로 계속 폭포 꼭대기로 올라가 보니 물이라고 구경을 할 수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 그런 줄 알고 인제 그 사람이 내려와서 부락 사람한테 와 가지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앉아 이런 얘기를 해요.

  “도대체 그 계곡에 올라가니 물이라고 구경을 할 수가 없는데 웅뎅이 두 개가 있고, 위에 있고 밑에 있더라.”

  그 웅뎅이 안에는 물이 마르지 않고 있더라. 이상하지요. 참, 물이 마르지 않게 떨어지거든 흘러 내려오는 물은 없고, 그런데 떨어지는 건 있고 거기 그러니 괴물이 있다고 해서,

  “괴물의 조화로다가 비가 오고 안 오고 그러니 어쩔 수 없어. 이 부락에 돼지가 있으니 돼지라도 한 마리 잡아다가 꼭대기 웅뎅이에다가 고사를 지내서 비가 많이 오게 해 줍소사 할 수밖에 없다.”

  그래 부락 사람들이 앉아서 들어 보니 그럴 듯 하거든요. 고사 지내가지고서라도

  “아, 풍년을 만나야지. 가물어 가지구서 타 죽고 흉년을 만나 굶어 죽게 되면은 굶어 죽는 것 보담은 나으니까 그렇게라두 하자.”

  해 가지구서 부락 사람들이 전부 찬성을 해 가지고 큰 돼질, 300근 짜리를 거기 올라가서 잡아 가지고 거기서 그 상을 놓구서 거기서 삶아 가지고 상위에다 올려놓고 고사를 부락 사람 전체 올라가서 고사를 지내구 거기다 고대로 놔 두고 그냥 내려 왔습니다.

  그런데 고사를 지낸 지가 하루가 지나 이틀이 지나 사흘 열흘이 지나 결과적으로 비는 계속 안 와요.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그 고사를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괴물이 고사를 받지 않았다는 거야. 그러니까 더군다나 더 아우성이예요.

  부락 사람들이 그러니 그 부락 사람 중에 가물어서 농사도 안 되고 하니

  “에라, 나들이나 간다.”

  지금은 차가 많아서 금방 빨리 갈 수가 있지만, 그전엔 나들이 간다면 개나리 봇짐을 먹을 것 싸 짊어지고 며칠 걸려 가지고 가다가 걸어가다 어느 심심산중에서 그저 물 있는데서 자고 가고 그저 며칠 걸려서 나들이 가는데, 그래 나들이 가서 그 부락 마을 사람들이 노는데 가서 찾아가서 같이 이렇게 놀다 보니, 그래 이 향성리라는 데는 가물어 가지고 흉년을 만나서 굶어 죽겠다고 그러니까 그 중에서 제일 연장자되는 80대 영감님이 하시는 말씀

  “자네 향성리서 왔나?”

  “네, 향성리에서 왔습니다.”

  “향성리 어떻다구?”

  “향성리에는 가뭄이 와 가지고 우리가 흉년을 만나서 굶어 죽겠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해야 될는지 알 수가 없군요.”

  “그래 향성리라는 덴 지금부터 35년전에 우리 친구들도 많이 살았는데 그 친구들이 거기다가 그 꼭대기 토왕성폭포라고 하는 꼭대기에 가믄 거 웅뎅이에 괴물이 있어 거기다 처녀 고사를 지내야 해. 처녀 고사를 지내야지 괴물이 받지. 딴 고사 지내선 괴물이 안 받아 그러니까 처녀 고사를 자네 가서 지내 보게.”

  그래 그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네 영감님 고맙습니다.”

  하고 그날 저녁에 자고서 이튿날 집으로 돌아 와서 향성리에 와서 마을 사람들한테 그런 얘기를 하니,

  “이 사람아, 처녀가 어디있어 처녀 고사를 지내. 거 쓸데 없는 소리를 하지도 마라.”

  아, 그러니 책임을 맡고 가만히 생각하니 그 부락 사람들이 생각하니 만약에 처녀 고사를 지내 가지구서 비가 온다고 하면 그것이 어떻게든지 처녀 고사 지내야지, 그래 처녀 고사를 안 지낸다고 그러니까 이 사람이,

  “아니, 그럼 왜 처녀 고살 안 지내긴 왜 처녀가 없으믄 한 집이 돈 얼마씩 내놔. 내가 가서 처녀를 사 올 테니.”

  그래 가지고 합의되어 가지고 돈을 한 집에서 얼마씩 내 놓으니 그걸 전부 모아 놓으니 굉장히 많았어요. 그래 그 돈을 가지고 어디 만침 두메 산골에 가니 처녀 5형제만 있는 집을 찾아 갔는데 거기 가서

  “처녀를 하나 파십시오.”

  지금은 서루 눈에 맞으면은 서루 결혼도 하고 청혼도 하고 그러지마는 그전에는 돈을 가지고 사다가 장개(장가)들었습니다.

  그래 처녀를 팔라고 하니까 지가 장개들라고 팔라고 하는 줄 알고 ‘자기 맏딸을 팔겠다’고 했거든요. 맏딸은 얼굴도 곱지 않은 곰보딱지인데 그 곰보 딱지를 돈을 많이 주고 사다가, 지금은 화장품도 많지만 화장품이 어디 있나요.

  그 화장품이 없으니 얼굴에다 밀가루를 발라 가지구서 허옇게 맨들어 가지고 목욕을 시켜가지고 그리고서 처녀 고사를 지내니, 처녀 고사를 지내고 내려오니까 어찌 비가 그렇게 쏟아지는지 그 농사를 그 물로 다 지어서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연연히 그때가 되면은 비가 안 와요, 그래 고 때만 되면 처녀 고사를 지내야 되는데, 그러니 처녀 고사를 지낼려니 부락에 처녀가 있는 거 쪼그만 아들을 인제 꼬마들을 갖다가 처녀 고사를 다 지냈지. 그래 다 지내고 보니 국민학교 다니는 처녀란 인제 씨가 말랐어요.

  고만에 그러니 처녀 고사를 지낼 수가 없지. 그러니 또 가물고 그러니 또 어쩔 수 없어 가지고 에라, 이걸 어떻게 해야 좋으냐. 그래 가지고 고민을 하다가 한 집이 보따리를 싸는 겁니다.

  “아니, 자네 어디로 가나?”

  “에이, 나 딴 데 가서 살겠네.”

  “왜?”

  “아, 이거 뭐 처녀래는 거 다 갖다가 제사를 지내고 국민학교 댕기는 꼬마꺼정 여자래는 건 전부 거기다 갖다 고사를 지내고 그 여자가 있어야 살지. 세상에 여자 없이 이루어지는 게 어디 있나. 여자가 있어야 나도 장가들고 아들도 장가 보내고 할 텐데 여자가 없어서 장가도 못 들고 이까짓 농토 다 필요 없습니다. 다 내버리고 가서 딴 데 가 살지요.”

  “이 사람이 자네만 그런 거 아니야, 나도 그래, 나도 너도, 나도 다 같이 누구나 이 부락 사람들 다 그런데 자네만 그런가. 그러니까 우리 부락 사람들 전부 다 가세.”

  전부 그 부락이 죄다 딴 데로 살러 가고 그 부락이 비어 있습니다. 그래 그 부락이 전체 비어 가지고 있으니, 지나가는 나그네가 한 번 거기를 지내다가 날이 저물어서 자고 갈라고 쥔을 찾아도 대답도 없고 이 집 찾아도 대답이 없고 저 집 찾아도 대답이 없고,

  “에라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고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사람이 없으니 에이, ‘개똥참외도 먼저 맡는 게 임자’다. 이거 아주 욕심내서 내, 좋은 기와집, 옥답 전부 내 거로 만들어서 내 거라고 해서 내가 농사를 짓겠다.”

  그래 농사를 지어 보니까 농사가 잘 지어져요. 그래 농사가 잘 지어져 가지고 농사를 지니, 딴 데 사람이 들어와 가지고 너두 나두 들어와 가지고 부락이 유지 되었어요. 그래 농사를 잘 짓는데 한 해는 또 가물이 와요. 가물이 와 가지고 이제 큰일났다고 말이야 굶어 죽겠다고 이러고 있는 찰나인데,

  “에라. 거 뭐 그전에 처녀 고사를 지내면 여기 뭐 비가 많이 온다고 했는데, 에구 그 딸 갖다가 처녀 고사를 지내.”

  그래 그 딸을 갖다가 처녀 고사를 달하고 합의되어 가지고 아주 어여쁜 딸을 갖다가 목욕을 시켜 갖고 처녀 고사를 지냈더니, 처녀 고사를 지내고서 이 괴물이 나와서 이 웅뎅이에서 나와서 처녀를 데리고 들어가나 처녀가 걸어 들어가나 어디 망이나 본다고 앉아서 망을 보니까 순식간에 그 안에 캄캄해지고 안개 모냥 자욱해지고 그만 그 옆에 있는 처녀도 보이지 않고 별안간 그냥 소나기가 쏟아내려 가지고 그냥 개울물이 부듯하게 내려 가거든.

  “에라, 보이지 않는 처녀 볼려고 애쓸 필요 없이 빨리 논에 내려가서 논에 물 들어오는 거 막구 말 파놓고 속히 방지해야지. 여기서 괜히 보이지도 않는 처녀 볼려고 할 게 아니다. 빨리 내려 가자.”

  하고 내려 가다 보니 그 밑에 웅뎅이에서 올라 오면서 이상한 거, 괴물이 올라 오거든, 그래 너두 나두 뭐 달리 봤지만 하두 바쁘니깐 수해 방지하기 위해서 빨리 내려 가서 논에 물 많은 것 따 놓고 물 들어오는 것 막고 수해 방지하자고 그날 저녁에 모여 앉아 가지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서로 얘기 하니 그 방안에서는 제일 연장자인 영감님이,

  “자네 오늘 본 거, 어디 본 거 한 번 그려 보게, 뭘 봤나?”

  “아주 이상한 거 봤습니다.”

  그래 지금은 그전엔 먹 아니면 없을 게 아니예요. 지금은 연필도 있고 하지만 그것도 없고 해 가지고 숯거멍을 가지고 신문지에, 신문지도 아니야 문창호지에 다 이렇게 그리니까. 뭐 대가리 같은 것도 그리고 몽통 꼬리 같은 것도 그리고 이렇게 가지고 그래서 이 영감님이 화가였던지, 그려 가지고 완전히 다 그린 것을 죄다 그려 가지고 맞춰 보니까 틀림 없는 용입니다.
이때 선녀탕에서 그 쳐녀를 여덟은 잡아먹고 요 마지막으로 아홉을 잡아 먹으면 용이 돼 올라 가는데, 그 틀림없이 용인데 용이 이제 올라 가면서 웅뎅이 그 꼭대기 웅뎅이 올라 가서 술 또아리를 틀었다. 다시 용을 쓰면서 그 폭포의 물줄기를 타고 하늘로 비천했다고 해서 날 비자, 용 용자, 비룡폭포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유만석, 남·50, 설악동, 1981. 4. 17>


40. 노학동 유래

  예전에 노학동이라는 게 노리 갈무리라는게 전문대학 있는 데가 노리거든. 노린데 노리가 4개부락이여. 4개부락은 도리원, 이목, 노리, 척산 그래서 일정 때도 이 4개부락이 2개 부락씩 도리원, 이목리 한 부락이 되어 가지고 서는 부장이 나와 가지고서는 이제 이 부락 일을 보고 척산, 노리 가지고 한 부락이 되어서 보고 이러다가, 아 그게 일정때, 대동아 전쟁나기 그 무렵은 아주 통합이 됐어.

  노리가 그 4개 부락이 그래 가지고선 부장이 하나 나가지고서는 4개 부락을 총지휘하고 그랬지. 근데 이제 노리는 왜 노리라 했냐면 거기 이 갈노(蘆)자, 갈대가 말짱 정착했으니깐. 제일 누가 정착을 빨리 했나면 그 쓸라면은 서씨네. 저 지금 차씨네가 그 다음 이씨네가 정착을 했어. 제일 최초에 이제 차씨네가 하고.

  그래 이제 도리원은 왜 도리원이라 했냐 하면 복상나무 꽃이 피서. 거기 이제 양지천이거든 그래서 도리원이라고 이름을 짓고 부락이름을. 또 이목리는 왜 이목리라 했냐면은 배꽃 이(梨)자 배나무꽃이 이젠 봄이면 하얗게 피고 예전인 제 개척 시에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말이여.

  부락이름을 척산을 왜 척산이라고 짓냐하면 이 척산 쭉 올라가면 왼짝으로 올라가면 딴봉이라는 데가 있어. 딴봉이 왜 딴봉이냐 하면은 여기는 지금 이렇게 된다면 여기는 양짓 마을이고 온천장 너메 양지마을이고, 요건 중간마을은 큰 솔대가 있으니 큰솔대가 있어. 거기를 중간마을이라고 해서 딴봉은 이제 이 지금 온천장인가 이짝으로 너메로서 여관이 하나있지. 개바닥에 여관 뒤로 올라가면 외딴봉 있는 게 자척(尺)자 같애. 그래서 거 자 척 자 같다. 그래 가지고서 그 자 척자를 써서 척산이라 한다. 지명을 그렇게 짓고 쭉 내려와요.

<김종태, 남·83, 교동, 1999.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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