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비문학 3

관리자
202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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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도문동과 비선대 유래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가 낙산에서 이 설악산으로 수도차 밟을 때 거기 오니까 뭐, 도대체 산은 울창하고 도저히 어떻게 건너가면 어디로 가야 될는지 그 위치를 모르겠다는 거야.

  그래서 거서 머뭇머뭇하고 있는데 불연 어데서 말이지 백발 노인이 나타나서 설악산 쪽으로 손짓을 하고 사라졌다, 이기야. 그러니까 인제 하나의 강선, 신선이 내려 왔다. 신선이 내려왔다 해 가주고 그 동 이름을 강선리(降仙里)라 이렇게, 그래서 지금 이제 다리 이름을 강선교라고 이래요.

  그래서 인제 그때 그 얘기를 듣고 말이죠 그 사람 손짓을 하는 데로 보고서 뚝을 따라 올라가는데 이 공중에서 말이죠, 어떤 그 당황한 그 말이죠. 음향이 들려서 법장을 멈추고 섰었는데 무아경을 이루었다.

  에, 그래서 인제 수도에 한 경지에 이르렀다 이러한 설이 있는데, 그래 인제 올라가는 길입니다. 설악산을 찾아 올라가는데 그때는 이 지역은 뭐, 전부 뭐, 산이고 솔밭이고 이래 도저히 무인지경입니다.
도저히 인제 길을 몰라서 그래서 지금의 도문동 쪽에 조그마한 부락이 있었던 모양이죠. 그래서,

  “여게서 설악산으로 갈라면 어디로 가느냐?”

  그래서 길을 물었다, 도를 닦으러 가는 도인이 길을 물었다. 그래서 도문이라 이래는데 그때는 물을 문자(問)를 썼는데 요즈음은 변화돼서 문문(門)자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를 닦으로 가는 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도를 닦으러 가는 길을 물었다.

  그래서 인제 이거 도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돼 가지고 도문동이라는 전설이 돼 있습니다.

  그러면 그 위에 쪼끔 올라가면은 지끔은 잘 흔적이 없습니다마는 지금 설악동 관광촌이 이쪽이 인제 오부뎅이 신단지로 구성돼서 내려오면서 거 보면 지금 현재 거게 파크호텔 거가 있죠. 에, 설악파크 있는 고게 능선이 하나 있습니다. 고 능선을 노루목곡(谷)이라고 그럽니다. 그전에는 그 안이 장항(獐項)입니다. 장항 인제 그러면 왜 노루목 고개라고 했느냐?

  그래 인제 도문동에서 길을 물어가 거기 갔는데 거가 뭐, 워낙 앞이 캄캄하고 숲이 깊어서 갈 바를 몰라서 거 머뭇머뭇 하는데 백록(白鹿) 그러니까 흰 노루죠, 흰노루가 흰 노루는 신성시 한답니다.

  백록이 와 가지고서는 고개와 몸짓으로서 말이죠, 도인들을 그 길을 안내했다 해서 그 노루목곡, 그래니까 노루목고개라고 했고, 그래 그 구릉(丘陵)이 말이 이래 생긴 것이 꼭 노루목처럼 생겼답니다.

  그래서 이제 그 고개 올라가 가지고 이 길을 찾아 올라와서 어데로 갔느냐. 그래서 저 와선대 가서 보고, 그 다음에 비선대로서 이 하늘로 올라 간 신선이 있었다. 이래 가지고 고와 같은 설화가 생겼다 이런 설이 있죠.

<장헌영, 남·54, 중앙동, 1981. 4. 26>


22. 도문과 신흥사

  도문 옹기마을은 도문이란 데가 유래는 자장율사가 낙산사 의상대에서 쉬구 이쪽으로 이제 들어왔는데 설악산 쪽으로 들어오는데 길을 물었데요. 그래 가지구 하도문(下道門)입구에서 맨 먼저 길을 물었다 이거구, 이 사람이 올라오다가 중도문, 상도문 이렇게 세 개로 되었지요.

  그담에 요밑에 장항리가 노루 장(獐)자하고 목항(項)자, 그건 그때 노루 속세의 말로 하면 노루의 목을 베고 거기서 잠을 잤다고 하는데 정확치는 않고 그래서 노루목이라고, 이렇게 됐구, 자장율사가 쉬어 가지구 이제 여기 들어왔다. 들어와 가지구 여기다가 맨처음에 향성사라구 짓고, 그걸 지었는데 화재가 자꾸 발생해 가지구 어느 날 스님이 꿈을 꾸었는데,

  “이 꼭대기를 더 올라가면 서북방 쪽으로 더 가면 싸리나무가 큰 게 있으니 그 싸리나무가 있는데 절을 지으면 이제 좋다.”

  그래서 꿈대로 절을 지었드니, 아주 절이 번성하고 잘 유지가 되었기 때문에 이름을 ‘신이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신이 꿈에 가르쳐 주어서 이제 지었다 해서 신흥사(神興寺)라구 했다 그래요.

<정형민, 남·60, 설악동, 1992. 4. 5>


23. 하도문의 지명유래

  하도문동 마을 내에서 마을 곳곳마다 불리는 이름이 있어요. ‘건너말’은 하도문 입구에 있는 마을이며 양짓말에서 보면 마을 중간에 있는 작은 개울로 건너편 (남쪽)마을이고, ‘고양터’는 마을 서북쪽 골짜기로 과거에 고(高)씨와 양(梁)씨가 살았는데서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해요.

  ‘방축골’은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가두어 두었던 곳이라 이렇게 불려온 것 같은데 지금은 저수지가 다 메워져 있고, ‘선녀골’이란 선녀가 내려왔던 곳이라고 이렇게 불리는 것 같은데 마을 뒷간에 있는 골짜기로 지금은 환한 느낌이 들어요. ‘골논’은 마을 뒤 고양터 동편 골짜기, ‘괴골’은 마을 뒤 골논 동편 골짜기지요. ‘신문턱’은 하도문과 중도문 사이에 있는 작은 둔덕인데 우리나라를 다시 찾은 기념으로 세운 ‘수복탑’이 여기에 있어요.

  ‘양짓말’은 산기슭 밑 양지쪽에 있는 마을을 가리키는데 이 집이 옛날 이 마을에서 세력을 휘둘렀던 함평 이씨의 집이라서 마을에서 가장 좋은 곳에 집이 위치해 있었던 것이지요.

  ‘송정리’는 솔밭 마을이란 뜻인데 예전에 하도문을 부르던 이름으로 큰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예요. 지금은 소나무가 많지 않은 것은 일제시대때 모두 베어가서 그래요.

<김근수, 남·78, 하도문, 1999. 11. 23>


24. 상도문의 전설

  역사적으로 보면 한 400년전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그 다음에 최초로 마을이 형성된 후에 여기에 오게 된 순서는 인동 장씨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먼저 와서 여기 살게 됐지. 그 다음에는 밀양 박씨가 와 살았고 그 다음에는 강릉 박씨가 와 살았고 그 다음에 강릉 김씨가 들어와 거주하게 됐지.

  나는 강릉 박씨예요. 옛날에는 여기가 설악산으로 올라가는 도로를 기준으로 해 가지고 오른쪽에는 처음에 인동 장씨하고 밀양 박씨가 살았는데 그 후에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왼쪽으로 옮기고 사는 것이 밀양박씨가 내려와 살게되었다는 얘기야. 그 후에 거기에 강릉 박씨가 정착하게 되고 그래서 이 마을에 재미나는 얘기라고 하는 것이 한 가지 있는 것이 뭐냐하면 밀양 박씨하고 강릉 박씨라고 있는데 이런 말이 있어.

  전해오는 말이 박씨를 지랄 박씨라고 그랬대요. 왜 지랄 박씨라 했냐... 원래가 지랄 박씨가 아니고 길 밑에 있다고 해서 지랄 박씨라 했다 하는 얘기가 내려오고 있지. 이 동네 성별로 정착된 이야긴 그거고.

  그 다음에 이 마을의 생김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은 배처럼 생겼어요. 지금 배처럼 생겼다는 것이 문헌에도 나와 있지마는 배처럼 생겼지 때문에 배에는 반드시 그물이 있어야 되고, 또 딸이 있어야 된다는 얘기야. 그랬는데, 그러니까 앵커 영어로는 앵커라고 하나? 닻, 그게 있어야 되겠지요.

  지금 오른쪽으로 가면 보통 여기서 말하는 그망골이라고 하지 그것을 원래가 그망골이 아니고 거망골이야. 거망골인데 그 거망골이라 하는 것은 그물을 말하니까 망이라 하는 것은 거망골. 이렇게 해서 지금 그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지 그 다음에 내가 추진하고 있는 딸이라고 하는 것, 고것이 여기에서 한 500미터 내려가면 그곳이 있어요.

  거기 지금 내가 상도문 돌탑정 복원에 대한 신문에다도 내고, 그 다음에 시에도 몇 번 가서 절충을 했는데 이게 제대로 돼있지 않아 이것을 내가 지금 복원을 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딸이예요.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은, 그 굵은 돌 옛날 사람들은 힘이 셌으니깐 굵은 돌로 산처럼 쌓았어요. 반원으로 이렇게 쌓는데 그것이 수해때 유실됐어요. 유실됐는데 그 장소가 좀 협소하지. 지금 거길 기점으로 해서 설악산 야영장까지의 제방 둑을 가로막아 놨는데 제방 둑 바로 맨 끝에 지금 소나무가 한 십 여대 있고, 거기가 지금 내가 몇 번 탐사해서 이것을 복원해 볼까 하고서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협조가 잘 안 되가지고 지금 못하고 있어. 그래서 이 상도문이라고 하는 것은 배모양이다 거망골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또는 말하자면 딸(앵커), 그것이 있고. 그래서 옛날에는 이곳에다가 우물을 못 팠어요. 배에다 우물을 파게 되면 물이 나오는데 그래서 우물을 파지 못하게 했는데 세월을 발전되다 보니깐 차츰 우물을 한두 집씩 파 가지고 펌프로 해먹다가 물을 마시다가 그 후에 상수도가 들어와가지고 상수도를 이용하고 있다.

  그것이 부락에 대한 이야기고 그 다음에 여기가 도문이라고 하는 이름이 왜 생겼냐는 문제거든. 이 전설상으로 봐서는 두 가지가 있어 한 가지는 도승이 설악산으로 가는 길에 도를 여기서 깨우쳤다. 깨우쳤다 해서 도문이라 얘기하고 간단히 말하면.

  또 한가지는 신선이 양양쪽으로 나가다보면 강현면이라는 데가 있어, 강현면 강선리, 그 강선리가 내릴 강, 신선 선 자를 써서 신선이 내려왔다는 얘기거든 신선이 거기 내려와서 설악산에 가는 길에 도문에 와서 길을 물었다고 해서 도문이라 이렇게 얘기하고 이 두 가지 물어서 도승이 이제 길을 따라서 설악산으로 갔지.

  설악산으로 가면 왼쪽으로 와선대라는 데가 있어요. 와선대가 있는데 와선대니까 거기서 자리를 잡고 쉬었다가 쭉 올라가면 비선대라고 있죠. 날 비자. 그래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래서 여기 이름을 도문이라고 지었다는데 두 가지 전설이 내려와있지.

  그 다음에 또 한가지는 여기에 무엇이 있냐면 육모정이라고도 얘기하고 또 그 앞에 가면 학모정이라고도 하고 육모정이라고도 하지. 거기는 전설이 어떻게 내려와 있냐 하면 거기 보면은 비석에 올라가자 첫째 비석. 낡은 비석이 하나 있지.

  그 비석이 강릉 박씨의 비석인데 그 비석이 ‘지’자 ‘의’자하는 할아버지인데 박지의라는 할아버진데 그 사람의 그 할아버지의 효자비야. 효자비. 효자비인데 왜서 그 할아버지를 효자라고 했냐 하면은 먼저 거기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봐야 할꺼야.

  그 비 내용이 어떻게 됐냐 하면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전 이름이 ‘지’자 ‘의’자가 국왕, 나라의 왕이 사망을 한 그러니까 사망을 했다는 소리를 듣고 이 양반이 거기다 제단을 만들어 놓고 북쪽을 향해서 삼 년간 상을 입었다고 해서 그걸 기리기 위해서 거기가 망곡터지. 그래서 망곡터다. 그렇게 전해 내려오고 있지.

  근데 지금 보면은 돌을 이렇게 쌓고 비석이 하나 서있는데 그 비석은 후 자손들이 만들어 놨지만 그 자체 터는 그 터는 옛날서부터 내려오는 그 터라 하는 것을 우리가 지금 알고 있지. 그 다음에 그 양반이 또 효자라고 하는 그러니까 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많을 뿐만 아니라 또 효심도 지극했다는 얘기야.

  근데 그 할아버지가, 내가 뭐 간단히 얘기하는데, 그 할아버지의 아버님이 병환에 누워있어가지고 아마 그 중병이었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그 중병을 자식으로써 보기 안타까워서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가지고 피를 흘려서 아버지를. 그래서 났았는지 안 났았는지 그거는 뭐 기록이 되어었지 않지만 그런 일이 있기 때문에 효자로서 남아있고 지금 효자각을 거기다 지금 세워 놓고 있어요.

  그런데 그 효자각 뒤에 보면은 비가 하나가 있어요. 비가 있는데 그거는 지금 비문을 아는 사람이 드물어요. 나만 글로 기어 들어가가지고 비문을 베껴 가지고 왔는데, 거기다 무어라고 썼냐 하면은 명선담은이라고 이렇게 써있어요. 명선담은.

  그니까 이게 고종때 이야기인데 이것은 그만치 부모를 위해서 효도를 했다고 해 가지고 이런 문구를 쓰지 않나. 단 네자로써만 쓰여있고. 그 기록에 대해서는 하나도 나와있지 않아요. 지금 그렇게 보지. 네자 풀이가 그러니까, 나도 지금 이 문제를 상당히 여러모로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하여튼 부모님께 효도를 했다는 그런 뜻일 꺼예요.

  내가 지금 봤을 때는 그게 글자가 확실히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대충 내가 이제 보는 견지가 그렇게 나와있고 이것을 시장이 이 글 이 비문을 좀 보내달라고 해서 보내줬는데 아직까지 거기에 대한 자세한 얘기가 없고 그거 지금 그냥 그렇게 내려오고 있지.

  그 다음에는 효자각은 여기서 약 한 1킬로 돌아가야 해. 산으로 싸리재라고 하는 데가 있는데 그리 쭉 들어가면 효자각이라고 하는 데가 있어요. 가볼 의사가 있으면 쭉 내려가 도랑 길이 있어요. 거기가 물어보면 다 알 수가 있어요.

  학무정이라고도 하고 육모정이라고도 해요. 그러니까 육각으로 되었다고 해서 육모정이지. 그렇게 지금 얘기하고 있지. 그 다음에는 또 뭐 그런 관계가 있고 그걸 자세하게 얘기해 줬으면 좋겠는데 강릉 박씨의 유래는 그렇고..... 벼락바위, 이리로 쭉 내려가면 벼락바위라고 하는데 벼락을 쳐서 둘이 갈라졌다고 하는 얘기가 나오는데 그거 지금 지방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뭐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참 좋지 않게 그 바위를 전부 표현을 하기 때문에 내 자신이 단지 그 바위는 벼락에 맞아서 깨졌다.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어요. 나로서는... 또 일반적으로 들어오는 그런 얘기를 들어보면은 여러 가지로 조잡한 얘기가 많이 있거든.

  또 후세의 자손들에게 그런 걸 알려줄 수 있는 앞으로도 학문적 가치가 있어 전설이 내려온다고 하면은 얘기해 줄 수 있지만 그것이 후 자손들에게 영향을 좋지 않은 영향을 줄까봐 내 그런 얘기는 하지 못하겠고 그것이 또 문헌에도 안나왔을 것 같애. 그러니까 지금 내가 얘기 할 수가 없고.

  그 다음에 그 설악산은 다 그거고 또 없는데 그 다음에는 이제 원래는 그게 망곡터였었는데, 망곡터였었는데 후에 여기 오씨네 집안에서 학자가 한 분 있었지. 글을 많이 아시는 그런 한 분이 있어 가지고 그 양반이 이제 여기에 서당을 차려 놓으면서 여름철에 거기서 글 하는 사람들을 학문을 가르치는 집을 지었지. 그래서 ‘육모정’ 이렇게 말하지.

  그니까 여기 배처럼 생겼고 그 다음 배가 움직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돌을 어떻게 쌓았냐 하면은 이런 형식으로 쌓은 거지. 근데 그런 얘기는 그게 필요하기 때문에 거기 쌓으라고 그래서 쌓았지. 쌓은 게 이제 9·13 수해때 아주 완전히 소실이 된 거지. 그런 영향이 있지 않냐.

  원래는 그 터는 망곡터였었지. 망곡터였었는데 그 후에 여기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 학자가 있어 가지고, 매곡선생이라고 있어요, 매곡선생. 그래가지고 서당을 이제 부락에서 자기 집에서 하다가 정자를 짓고 여름철이면 거기서 학문을 가르쳤지.

  학무정. 배움의 날개를 펴니까. 그래 학무정이라고 하지. 현판은 대부분 내가 생각컨데 또 전해 내려오는 얘기를 들어보면은 현판은 인제 거기 인제 육모정이라고 하는 것이 이제 부근에 드물거든 그니까 그 양반도 학자니까 자기 친구들이 여름철에 놀러와서 친구들이 아마 현판 같은 것을 써줬을꺼야. 그래가지고 부착했고.

  그리고 여기 역사라고 하는 것은 그다지 전설적인 얘기가 드물어요. 근데 여기가 지형이 지역으로 보면 옛날 38이북이거든 여기가 38이북이 되나서… 또 그뿐만 아니라, 삼국시대라든가 또는 그 후라든가 그 이전에 보면 여기 예맥지대거든 예맥. 예맥이라는데.

  여기 예맥지방에 대해서 고구려하고 신라 백제의 경계 지방이란 말이야 그래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특수한 일이 없어요. 내가 본 문헌을 찾아봐도. 특수한 뭐 무덤이라든가 또는 특수한 고적이라던가 이런 게 없어. 그 경계선이니까 이게 다 아무래도 발전상으로 봤을 때 지금이나 옛날이나 마찬가지니까 같지. 그렇다고 난 보지.

  이것을 그 유실되는 곳을 있는 곳이 어딘가 하는 것은 몰라요. 내가 발견을 했기 때문에 지금 현재까지 알게 됐지. 그래서 내가 이제 시장님한테도 호소문까지 내고 또 뒤에 보면은 이렇게 인제 이렇게 날인까지 받아 가지고 할려고 한 게 협조가 좀 부족해서 지금 못하고 있지. 누가 하던지 내가 발설을 해놔서 누가 하던지. 지금 시에도 한 통 가있고, 설악산 국립공원에도 한 통 가있고, 그 다음에 또 한 통은 내가 갖고 있으니까 언제가 되던지 복원이 될꺼 같애. 또 돼야 되지. 속초시는 문화유적이 드물거든. 아까 말한 거같이 그런 관계일 것 같애. 누가 하던지 할꺼야.

<박용훈, 남·72, 상도문, 1999. 11. 30>


25. 설악산과 마의태자

  설악산은 어떻게 되어서 설악산이냐, 눈이 많이 와서 설악이냐 아니여. 설악이란 건 왜 설악이냐 하면 춘하추동 사시절 봉우리 끝을 보면 눈이 온 것 같애. 늘 하얘. 늘 하얗고 울산바우만 불겋지. 자색이 나지.

  설악산은 해를 지고 산 앞을 보면 첫 눈이 온 것 같이 “초설경(初雪景)이 설악(雪岳)이다” 첫 번 약간 내린 눈 온 것과 같다. 설화령(雪化嶺)이 설악이다. 눈으로 화한, 눈 온 것 같은 것이 설악이다. 그렇게 됐어요.

  설악산 유래가 근데 설악산 전체를 그렇게 놓구는 자장율사가 천 년 그맘때 들어와서 향성사를 먼저 지으셨거든. 향성사를 자장율사가 짓구 그때에 권금성에 마의태자란 이가 떠나니까 군대가 쫓아온 모양이야. 아래서 힘 센 사람이 돌을 던지니까 위에서 받았다는 그때 이야긴데 권금성에 올라가면 돌 쌓은 게 뵈키구 권금성 안짝에도 돌을 일 곱자 쌓았어요.

  첫 번 들어와 정고평에 가면 초소막이 있어요. 사방 열 자쯤 되는 초소막이 있어요. 석자 넉자 되게 거기서부터 쌓았어요.

  권금성까지 마의태자 패가 집을 거기다 짓는데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 북대문 오행으로 짓는데 동대문은 동방 살팔목오왕성문이라, 동대문이라 안하구, 서대문은 서방일치화화엄산문이라. 남방일율수왕성문이라, 중앙목이오십토문이라, 중앙을 말하니까 네 군데 문을 내구 위는 복판을 집을 지으니 중앙목이 오십토왕문이라.

  “우리집 택호는 토왕성집이다.”

  이래서 인제 토왕성폭포가 생겼지. 옛날에는 신광폭포여. 신광폭포때 이네들 마의태자가 참 토왕성을 지어 놓구는 그담에는 폭포를 토왕성폭포라 지었어.

  그래서 지금 토왕성이 내려오지.

<박일호, 남·78, 노학동 2/5, 1992. 4. 5>


26. 설악산과 금강산

  설악산은 처음엔 설산(雪山), 설봉산, 설악산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한반도 중부 평령을 가등한 영점에 높이 멋지게 솟아 오른 설악산은 해발 1,708m로 우리나라에서 세번째로 높은 산입니다. 태백산맥을 동·서 양쪽으로 나눠 서쪽을 내설악, 강원도 인제군이라 하면 동쪽을 외설악, 강원도 속초시라고 부릅니다.

  금강산은 고구(古久)로 서림의 상합이라고 불렸지만 설악산은 살매 설악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한 해답이라고 하겠습니다. 원래 설(雪)은 살의 음역이요, 살은 인간의 활동상을 뿜어 놓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산다고 생명, 숨을 쉬니 호흡, 인간, 쌀미(米), 샘천 등을 포함하는 한 어군(語群)이 되고 있으며, 불교에서도 불타의 몸에서 나온 염주와 연골을 가리켜 사리라고 합니다.

  청정한 생명의 신비적인 표시물을 연골이라고 하였으니 ‘설악’이라는 ‘설’은 결국 신성을 의미하는 살의 음역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금강산 대(對)설악산, 설악산 대 금강산, 금강산과 설악산은 아형아제라.

  금강산을 형이라 하고 설악산을 동생이라고 할 수 없고, 설악산을 성이라 하고 금강산을 동생이라고 할 수가 없다.

  “금강산과 설악산은 아형아제(阿兄阿弟)다.”

  금강산은 그 어여쁜 아가씨가 화장을 하고 노상에 앉아 노정을 하고 있는 형색이라고 하면, 거머뭉특한 남자가 떡 골방지침을 도사리고 앉아 있는 형색입니다. 금강산보다 설악산이 더 높고 과연 멋있는 게 설악산이지요.

<유만석, 남·50, 설악동, 1981. 4. 17>


27. 신흥사 유래

  지금으로부터 1320년 전에 신라의 왕족 소판 3품 벼슬을 가지고 있는 그 물인공의 아들이 인생의 속세를 떠나서 당나라 풍남사, 지상사, 온나라 윤재사, 개국사에 들어 가서, 20년간 도(道)를 통달하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오대산 갈래사를 창건하고, 부사리 150장을 보완해서 절 앞에는 9층 석탑을 세워서 보완하고 설악산에 들어 왔습니다.

  설악산에 들어 와서 사찰을 창건하고 절 앞에는 부사리 33장을 보완해서 8층 석탑을 보완하고 수도를 했는데, 그 창건한 지 223년만에 화재로 소실되었어요. 그래 화재 당시에 6층이 파손되고, 현재 3층만 남아 이 사찰의 추억을 외로이 말없이 그리며 현재 역시 견고합니다, 3층 석탑이. 그 자리는 어딘가 하면, 지금 설악호텔 밑에 국민학교 분교 그 자리가 그 옛부터 자리입니다. 향성사.

  그래 인제 화재로 소실되었고, 사찰이 없게 되었는데, 그러니 의상대사가, 태백산 부석사를 창건하고 영동으로 쭈욱 올라오면서 보니, 그곳은 꼭 사찰이 있을 만한 곳이라 생각하고, 사찰을 창건했습니다.

  사찰을 창건하고, 그 사찰이 전에는 사찰이라고 하지 않았고, 기원도장(祈願道場)이니 호국도장이니, 기원종신으로, 적군이 들어오면 적군을 물리친다는 승려들의 정신을 길이 길러서 보존하기 때문에 호국 기원도장이라고 창건한 것이 지금 현재 낙산사(落山寺)지요.

  낙산사가 그 전에 낙하사라고 불리었고, 그 낙하산 떨어진 거와 똑같애요. 그래 그 후에 낙산사라고 불렀지요. 그래 설악산에 들어와 보니 성인이 창건한 사찰도 223년만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곳은 가장 사찰이 하나 있을 만한 곳이라 단정하고 쭈욱 올라 와서 사찰을 창건했습니다. 그래 사찰을 창건하고 사명(寺名)을, 선정사(禪定寺)라고 사명을 붙였습니다.

  그 선정사를 창건하고, 봉안할 불상이 없어서 밤낮 7일간 수도를 하고보니 한 날 밤 꿈에는 어느 도승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너는 저쪽에 가면 산 불상이 있으니, 산 불상을 갖다가 봉안하고 수도해라.”

  깨 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래 하도 신기해서 그 이튿날 가서, 꿈과 마찬가지로 가 보니, 산 불상이 있어서, 그 산 불상을 갖다가 절에다 봉안하고 수도하고 있었는데, 의상대사가 선정사를 창건하고, 수도한 지도 150여 년만에 역시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화재로 소실되어서 그 옛터를 비워 두기가 너무 애석하다 해서 암자를 창건했는데, 능인암(能仁菴)이라는 암자를 창건해서 수도를 했는데, 금강산에도 수도하던 비구니 김수영 씨가 자기 선조들이 수도하던 정지인 줄 알고 와 보니, 사찰은 화재로 소실되고, 암자에서 승려들이 수도를 하고 있는데 공양을 잇기가 곤란해서 자기 토지 50 뜨락을 헌납하고, 공양을 이어 가면서 거기서 수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지금 어디냐 하믄 계조암 밑에 내원암(內院庵)입니다. 내원암이라 불리어 오고 있지만, 그 능인암에서 수도하던 한 날 밤 꿈에는 어느 백발 노인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너는 저 밑에 내려가서 사찰을 창건하고 수도해라. 그러면 너 삼재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3재라는 것은 뭐냐, 사찰의 3재라는 것은 요 근년에 와서는, 그것이 불가능한 얘기지만 예전으로 말하자면 아주 적당하고 꼭 3재의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 3재라는 것은 첫째 화재, 둘째 호랭이가 수도하면 와서 물어 가요. 그래 호환이라고 하는데, 세 번째는 빈대가 많아서 쫓겨가는 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고개 3재지요.

  그래 하루는 승려가 꿈에서 깨어나서 하도 신기하다고 해서 세 승려가 앉아서 꿈 얘기를 하고 보니, 세 승려가 역시 똑같은 꿈을 꾸었어요. 신기해서 그 이튿날 내려가서 보니 넓고 좋은 공지(空地)가 있어 게다가 사찰을 창건하고 사명을 신의 게시로 이루어진 사찰이라 해서 귀신 신(神)자, 일 흥(興)자, 신흥사라고 칭호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신흥사에 들어가면 지금 그 원통 보존의 3불상이 있는데 3불상이 지금 있어요. 있는데 그게 의상대사가 선정사에서 그 3불상을 봉안하고 있던 불상이에요. 그게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그 3불상만은 남아가지고 그 3불상은 현재 신흥사 원통보존에다 봉안하고 수도합니다.
복판에 있는 것. 크고 양 가생이가 적지요. 복판에 있는 것은 아미타불, 우리측이 있는 것은 세존보살, 좌측에 있는 것은 관음보살이예요. 그래 3불상입니다.

  낙산사는 원통보존이고 그건 관음보살상입니다. 원통보살상(圓通菩薩像)이지요. 그래 원통보전(圓通寶殿)이라는 것은 관음보살이다, 관음보살이라는 것은 어머니를 상징하는 거고, 극락보존의 아미타불이라는 것은 아버지를 상징하는 것이 불교에서 얘기라, 그렇게 칭호를 붙이고 있습니다.

<유만석, 남·50, 설악동, 1981. 4. 18>


28. 신흥사 유래

  신흥사는 처음에는 향성사입니다. 신라 선덕왕 때지요. 자장율사가 저 양양 상운이란 데가 있습니다. 상운이라는 데는 역 중에서 우두머리인 찰방이 주재하던 곳입니다. 그러니 상운리에서 이 부근 고성, 양양을 관장했지요. 자장율사가 그 상운리에 와 보니까 지금 신흥사 있는 쪽에서 서운(瑞雲)이 서기(瑞氣)가 비치더랍니다. 그래서

  “야, 저기가 부처님이 계실만한 곳이구나.”

  그래서 모든 둘레가 향기로 싸여 있다고 해서 뭔가 반드시 서기가 어렸으니 부처님이 계실 만한 곳이구나. 그래서 모든 둘레가 향기로 싸여 있다고 하여 중향사(衆香寺)라 하지요. 뭔가 계실 만한 곳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지금 뉴설악 호텔 앞 그 자리에 절을 짓고 향성사라 했지요. 바로 거기에 3층탑이 남아 있지요.

  그거가 향성사 처음 지었을 때 탑입니다. 탑인데 처음에는 그것이 5층이라 했는데 임진왜란때 없어지고 지금 3층이 되었답니다. 그래서 향성사라 이름 지었는데 화재를 만나 가지고 나중에 다시 짓게 되었는데 지금 내원암에 의상대사가 옮겨지었답니다.

  그래 이름을 선정사(禪定寺), 선을 아주 중심해서 이루어진 절이라 해서 그래지었는데 거기서 다시 화재가 나니 터가 나빠서 이렇다 해 가지구 정보 원년 인조 22년(1644)에 영서 연옥 두 선사 꿈에 신선에 나타나서 지금 있는 신흥사 그 쪽에 절을 지으면 번창하고 잘될 것이다 해서, 그래서 지어서 신이 나타나서 절을 이룩했다 해서 신흥사라 이름을 지었답니다.

<박익훈, 남·77, 교동, 1992. 4. 21>


29. 울산바위와 송강 정철

  정철이 관직에 있을 때 일화가 있죠, 송강 정철이 봉정(鳳頂)이라고 하는 저, 지금 현재 대청봉 산봉을 갖다가 봉정이라고 그러죠. 그래 그 당시에 그 정철이가 관에서 들을 때 이 설악산에서 역적이 난다는 말을 들었단 말이야.

  그래서 이 봉정에 와서 혈을 찔러서 역적이 나지 못하도록 혈을 찔르러 왔단 말이지요. 그 송강 정철이가 그런데 설악산 입구에 떡 와가지고서는 아, 이 봉정에 혈을 찌르려고 산을 올라가는 판이예요.

  올라가는데 웬걸 산 입구에 탁 다다르니까 말이지 그, 마 여름철이었던 모양이죠.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지면서 갑자기 뇌성 벽력이 들이 내려치는데 울산 저 우는 산에, 울려 가지고 말이죠. 찌릉찌릉하는데 인제 막 아주 몸이 오싹오싹할 정도로 대단한 소리가 나드라 이 말이죠.

  그래 가지고 그 험한 길을 그 올라가느라고 무한한 애를 썼어요. 애를 써 갖고 그 저 산꼭대기에 올라가 사방을 살펴보니 아주 산이 말이여. 성역하고 신선하고 말이지.

  “이런 풍치 속에서 역적이 날 리가 없다. 이 명산인데 이 명산에서 어떻게 역적이 나느냐?”

  그래 가지고 정철이가 그 당시에 그 올라가면서 아주 고생을 해서 답답한 마음으로서 내뱉은 말이

  “에, 설악이 아니라 베락(벼락)이구, 구경(求景)이 아니라 고경(苦境)이고, 봉정(鳳頂)이 아니라 난정(難頂)이라”

  어렵다 그렇게 일화가 있단 말이죠. 그리고 그 다음에 며칠 쉰 다음에 이러한 성역이고 명산에서 역적이 날 리가 없다.

  그리고 정철이가 돌아가면서 그 에, 세 번째 들어와서 고생을 해서 그 답답한 심정으로서 내 뱉은 말이 바로 그건데, 그래서 이제 천후산 그 천후산이 그 뇌성이 치고 하면 다른 산보다 많이 울리고 우는 것이 이 설악산 그래서 우는 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제 앞으로 이 천후산은 그 원 고명(古名)을 그대로 인제 앞으로 밝혀 주어야 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장헌영, 남·54, 중앙동, 1981. 4. 27>


30. 울산바위와 의덕장사

  울산바위는 일명 천후산(天吼山)이라고도 합니다. 하늘 천(天)자, 사자 울음 후(吼)자, 하늘에서 사자 울음소리가 난다고 천후산이라는 칭호가 붙었습니다. 울산 바위는 사방이 절벽으로 나는 새도 면하기 어려운, 6개의 봉으로 이루어진 영동에서 으뜸가는 돌산입니다.

  울산바위 중허리에 구름이 덮혔을 때는, 밑에서 이렇게 쳐다 보면 일견, 연못에 연이 막 피어오르는 듯하다 하여 연화반개산(蓮花半開山)이라고도 하고, 어떻게 보면 큰 대숲을 뒤엎어 놓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울산 바위는 지금까지 한 얘기는 유래고, 전설로는 경상남도 울산군에 있던 바우지, 여기 있던 바우가 아닙니다. 여기 바우가 없었을 적에는 평야 비슷하게 되었겠지요. 그러나 불교가 세계적으로 처음에 번성하기는 저 인도에서부터 번성해서 서양으로도 나가고, 중동으로도 나가고 동양으로도 오면서 당나라 동남산, 지상사, 윤재사, 개국사를 거쳐서 금강산 산계사, 유점사, 장안사를 거쳐 금강산에도 들어 왔을때 금강산에는 승려들과 도승들이 많기로 유명했고, 금강산에는 우리나라도 유명해서 금강산에는 천하장사들이 많기로 유명했습니다.

  금강산 천하장사인 의덕장사라고 하는 장사의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나는 금강산 신령인데 너 금강산이 몇 봉우리인지 아니?”

  “금강산은 11,999봉이로다. 우리 나라는 물론이거니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금강산이 한 봉이 없어 12,000봉이 되지 못했대는 것은 분하기 한이 없으니 너는 이유를 막론하고, 어디서 한 봉우리를 갖다가도 채워 놓도록 해라. 만약 너가 안 채워 놓으면 너의 신상에 해로울 것이다.”

  깨보니 꿈입니다. 그래 의덕장사가 가만히 앉아 꿈을 생각해 보니 이 꿈을 보통 꿈이 아니예요. 앉아서, 누워서 세월을 보내다가, 산신령께 벌을 받아 죽어도 죽을 꺼고, 그저 힘이 천하장사니 어디 가서 한 봉우리를 짊어지고 가다가 힘에 지쳐서 죽어도 죽을 꺼고 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에라, 어디가서 한 봉우리를 짊어지고 가다가 힘에 지쳐 죽는 것이 우리 남아일 것이다.”

  그러믄 남북을 이렇게 생각해 보면, 북쪽에는 산악지대가 많이 있으니 북으로 가면 마땅한 봉우리가 있겠지. 그래 북으로 가면서 샅샅이 더듬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더듬으며 찾아 봐도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고 마땅한 봉우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북에 없으니 어짜피 남으로 더듬어 보자. 남으로 내려오면서 약 한 보름 동안 더듬어도 마땅한 데가 없어요, 마땅한 봉우리가. 그러니 마지막으로 경남 울산에 가 보겠다고 울산을 가니 저렇게 커다란 봉우리가 있습니다. 그래 그 바우를 보니 바우는 명 바우예요.

  그래 의덕장사가 울산에서 바우를 짊어지고 금강산에 한 봉을 채우러 짊어지고 가는데, 가다가 무거워서 쉬어 갈라고 생각해 보니 만약에 내려 놓았다가, 짊어지지 못할 우려성이 많으니깐 내려 놓지를 못하죠. 먹을 것은 없죠, 자지도 못하고 땀은 비오듯 흘러, 오줌 똥도 마려워도 오줌 똥도 걸어가면서 바지에다 싸야되고 땀에 젖어, 오줌 똥에 젖어 냄새는 나지만 냄새 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죽을 때까지 금강산에 져다 놓겠다는 결심을 한 사나이다. 그래 밤낮을 가리지 않고 15일 동안 거쳐서 짊어지고 오는데 양양 고을이라는 데를 지나오게 되었어요. 여기서부터 금강산이 얼마 멀지 않으니 없는 힘을 더 내서 지고 가야겠다고 결심을 먹고 지나가는데, 나그네가 어디서 헐레벌떡하고 뛰어 오더니만 하는 말이,

  “장사님, 그 큰 바우를 어디로 뭐 할라고 짊어지고 가십니까?”

  “이 바우는 금강산에 한 봉을 채우러 짊어지고 간다.”

  “금강산은 만 이천봉이 다 확보되었으니 그 바우는 필요 없습니다. 여기다 놔 두십시오.”

  “아 그래, 그럼 여기다 놔 둬야겠구나.”

  15일 동안 무거워서 쉬지도 못하던 바우는 갑자기 내려 놓는다는 것도 큰 고민입니다. 그러니 자기도 모르는 순간에 짊어지고 서성서성하다 그냥 내팽개치고 장수는 자기 갈 데로 갔죠.

  그래 이 바우가 가만히 생각하니 아주 괘씸하고 분해 죽겠어요. 왜 분하고 괘씸하냐, 그래 인제 가만히 놔두지도 않고 패댕겨쳤으니 어찌 분한지 통곡을 하고 앉아 울다 지쳤다, 울다 지쳤다.

  나중에 울음이 안 나오니 가만히 앉아 생각하니 아주 괘씸해 죽겠거든요. 차라리 경상남도 울산군에 그냥 놔뒀더라면 그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으니 주민들이 가끔 올라와 하는 말이,

  “그 참, 놀기 좋다, 명승지다,”

  그 누차에 걸쳐 그런 소릴 많이 들어 대 환영을 받았지요. 그러나 금강산의 봉우리로 간다기에 더 좋던 바위가 금강산에 가지도 못하고 첩첩산중 두메산골 사람도 살지 않는 두메산골에다 가만히 놔두지도 않고 패댕겨 쳤으니 어찌 분한 지, 울상 바위라 합니다. 여러분들이 올라가면 바람이 불어 올때면 심산에 사자가 우는 듯하게도 울려오고 있습니다.

<유만석, 남·50, 설악동, 1981.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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