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영랑호 용이야기
옛날에 용이 하나 있었어. 그 용은 승천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용이었어. 그 용은 여의주를 달밤에 아가리에서 빼내 가지고 달빛을 비추어야 했지.
그런데 그곳에는 여의주를 노리는 이무기가 한 마리 있었거든. 어느 날 용이 잠시 한 눈을 판 사이에 이무기가 여의주를 눈 깜짝할 새에 삼켜 버렸지. 그래 가지고 용이 된 이무기는 승천을 하고 남은 용은 자신의 여의주를 빼앗아간 이무기를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지. 그때 흘린 눈물이 고여 생긴 것이 영랑호였어.
<이상기, 남·41, 금호동, 1999. 12. 17>
12. 영랑호 전설
영랑이라는 화랑이 와서 수도를 하고 놀다 갔다해서 영랑호라 하지요. 사실은 이 영랑이라든가 술랑이라든가 남랑이라든가, 이건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또는 화랑도 한 팀의 이름이다.
근데 숙종 때 김삼연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분이 자기 아버지 때 높은 관직에 계셨는데 율곡 선생하고 같은 시대야.
양반의 자손으로써 지켜왔기 때문에 백담사에서 조금 가다보면 그게 왜 영시암이라 했냐하면 화살을 한번 쏴 노면 영원히 못 돌아온다 해. 나는 여기 앉아 있으면 안돌아 간다 그래서 영시암이라 한다.
그 양반이 영랑호에 와서 글을 썼는데 경치가 좋아 놀다 가려니 경치가 너무 좋아서 사흘을 통곡하고 갔다는 글이 있지.
그렇게 영랑호의 경치가 좋아서 나도 맨 처음엔 깜짝 놀랬어. 또 요즘도 처음와서 영랑호를 처음보는 사람은 탄복않는 사람이 없소. 내가 예전에 영랑호를 자주 댕겼거든요.
근데 어떤 청년 한 명이 가며 한다는 말이
“아저씨 이 호가 뭐래요? 이야 이렇게 좋은 호수에 왜 사람이 없소?”
“외진 곳이라 사람이 안와서 그렇지.”
그렇게 처음 보는 사람은 탄복을 하지.
근데 여기 청초호는 쌍성호라 했어. 『동국여지승람』에 쌍둥이로 이루었다, 왜 그러냐 하며 내가 생각해 볼 때 영랑호는 화랑이 왔다갔다해서 영랑호라는 이름을 받았거든. 근데 저게 이름을 못 받았다 이거야.
근데 호수가 쌍둥이처럼 생겼거든. 쌍성호라고 붙였겠느냐. 근데 청초호도 『동국여지승람』에 뭐라 써있냐 하면 경치가 얼매나 아름다운지 영랑호보다 났다 그래서 『택리지』를 쓴 이중환이가 관동팔경에 낙산사를 안 넣고 청초호를 넣어서 유명해 졌다고.
청초호에는 옛날에 용암이라는 속초 교동 앞에 가면 바위가 큰 게 있었어요. 그 바위가 이름이 난 것은 한말에 남궁억 선생이 양양군수와 있었거든요. 우리나라가 한일 합방직전에 그때 와 있었어요. 애국자니까 이 양반이 사월 초파일에 화전놀이를 해서 더욱 이름이났다 이거여.
그때 이 대포동이 아주 이 부근에서 중심지였는데 왜냐 하면 그 항구가 이 부근에서 제일 수심이 깊다 이거야. 그러니까 이 부두에 하까다라는 배가 우편물을 싣고 사람도 태우는 그런 배가 있는데 거기를 떠나 대포를 들러서 원산까지 댕겼지.
그래서 교통이 편리해서 대포가 중심지였어요.
대포를 중심으로 해서 미시령으로 넘어가는 육로가 있고 배가 수로를 그렇게 댕기고 육로는 거기서 인제 회암산을 타고 원산으로 통하고, 그렇게 인제 교통이 편리하다 이렇게 쓰여 있어요.
영랑호는 영랑이란 화랑도가 지나갔다. 그런데 그걸 자세히 보면 영랑도이니까 영랑도가 한 개인이 아니라 단체로 해석되고, 결국 화랑이 수도했다는 역사에 의해 영랑호라고 지었다고 볼 수 있지.
<박익훈, 남·84, 교동, 1999. 12. 1>
13. 영랑호와 달마대사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에 신라시대 화랑인 영랑(永郞), 술랑, 삼조, 남석등이 금강산으로부터 고성 삼일포에 와서 3일동안 수련을 하고 각각 분산했습니다. 영랑만이 이 호수에 와서, 뱃놀이를 하며 선유하던 곳이라 해서 이 호수의 이름이 영랑호라 불리어 왔습니다.
영랑호 남쪽 기슭에 송림이 울창한 복판에 자그마한 사찰이 하나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서기 637년전에 정혁담이라는 승려가 사지를 건립하고 53불의 보광부처를 보완하였다고 해서 보광사(普光寺)라고 이름이 불려왔습니다.
그리고 영랑호는 아주 물결이 맑고 잔잔해서 언제나 어족이 풍부하며 낚시를 즐기는 태공(太公)들과 뱃놀이를 즐길 수 있는 좋은 속초 시민의 휴식처가 바로 영랑호입니다.
그럼 영랑호를 떠나서 유래를 마치고 그전에부터 불교가 맨 처음에 어디서부터 번성했나 하면 인도에서부터 번성했는데, 인도에서부터 번성하면, 당나라 동남사, 지상사, 원나라 윤재사, 개국사를 거쳐서 금강산으로부터 금강산 신개사, 유점사 장안사 3개 사찰을 거쳐 가지고, 이 영동지구 관동8경을 쭈욱 내려 오는 그 승려가, 원래는 승려가 말을 탔다고 하면 위법적이지만, 그러나 거리가 워낙 멀고 보니 어딘가는 그 아주 말먹이가 무성하게 자라 있고 그 꼭 말 먹이를 했으면 좋겠어서 말에서 내려서 풀을 비어서 말을 먹일라고 풀을 비어서 등에다 싣고 말을 타고 올라와 보니 점심 때가 되었어요.
시장끼가 있어 하는 것 같아서 그 풀단을 풀어 가지고 말을 먹이고 그래 ‘먹이재’라 하는 데가 오늘날에 와서 그 풀단을 풀어서 먹였다고 해서 먹이재입니다.
그래 먹이재를 거쳐서 이 봉우리 꼭대기를 올라와 보니 인도에서부텀 포도 전법이 부족한 지라 여기서 수 년간 수도를 해야 되겠다 해서 그 바위 틈에서 수도를 수 년간하고 그래서 거기서 도(道)가 통했어요. 그 포도 전법을 통달을 해서 그분이 그제서 도가 통했다고 해서 이를 ‘달마봉’이라 불렀고, 달마대사가 바로 이 분입니다.
<유만석, 남·50, 설악동, 1981. 4. 17>
14. 청초호 용경(龍耕)
청초호에 대해서는 청초호를 중심으로 해서 그러한 경이 나오는가 하면은 청초호가 또 한가지는 옛날에는 그 겨울에는 호가 업니다. 어는데 얼음을 보고서 그 다음해의 농사를 풍흉을 그 점쳤다고 하는데, 그건 어떻게 보는가 하면은 얼음이 어는 것이 꼭 논을 갈아 논 것같이 그런 얼음이 업니다.
그걸 갖다고 용경(龍耕), 용갈이, 용이 논을 갈아 놓았다는 듯이 용경이라고 부르는데, 그래서 인제 그 용경이 누워 있는 방향을 보고, 그 해에 농사가 잘 되겠다 못 되겠다 하는 것을 아마 점쳤다. 그래서 그와 같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청초호이면서 이 청초호는 앞으로에 우리 속초로 봐서는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해야 된다는 것이죠. 이쪽에 남을 향해서 갈아 났을 때 풍년이 들고, 북으로 향해서 엇갈이로 갈아 놓았을 때는 흉년이 든다. 그래서 남북을 나눠서 길흉을 점쳤어요.
<장헌영, 남·54, 중앙동, 1981. 4. 27>
15. 청초호와 민속
청초호를 쌍성호라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쌍성호라 했냐하면 영랑호하고 청초호하고 호수가 둘이기 때문에 쌍둥이 이기 때문에 쌍성호라 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청초호 호수 가운데 청룡이 살았다 해서 청초호라 하고 영랑호는 황룡이 살았다 해서 황호라고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영랑호라면 기록에 엄연히 영랑(永郞)이란 게 남아있고 또 이쪽은 쌍성호라고 남아 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할 때는 같은 호수인데 영랑호는 이미 이름을 얻었고, 청초호는 이름을 못 얻었기 때문에 부득이 그렇게 썼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청초호에서는 무슨 놀이가 있었나 하면 논뫼호의 불꽃놀이, 논산을 우리말을 하면 논뫼가 됩니다. 뫼 산(山)자니까 지방사람들이 그 당시에 청초호를 논뫼호라고 불렀다 이겁니다.
그런데 옛날 봉건시대에는 높은 사또가 부임하면 지방사람들이 그 사또에게 잘 보일려고 환영식을 하는데 여기서 해 왔다는 것입니다.
해왔는데, 남궁억 선생 때까지도 그런 것이 있었다 그런 얘깁니다. 그 다음에 남궁억 선생(1863∼1939) 그 다음에 최모 씨던가 그 양반때 일본에 우리나라를 빼앗겼거든요. 그래 없어졌는데 왜 없어졌냐하면 그런 불꽃놀이 하다가 빠져 죽은 익사사고가 생겼다. 그래 없어졌는데 이런 일을 해서는 안되겠다. 일본사람들이 우리의 풍속을 없애려던 차에 호기가 됐고 한가지는 여기 용암이란 바위가 있었답니다.
그 길이가 구척이나 된다고 써있습니다. 그런데 남궁억 선생이 4월 초파일에 이 지역사회분들과 거기서 술을 나누면서 얘기를 했다. 일본사람들이 쓴 글이니까 주연을 베풀었다. 그래서 청초호가 한층 더 이름이 높이 났다. 그렇게 써 있습니다.
그런 바위를 항구를 만드느랴고 그 바위를 깼습니다. 박상희란 분이 청초호를 개항하기 전까지만 해도 바다 게가 얼마든지 많았는지 사람들이 가을철만 되면 밤에 횃불을 켜들고 쭉 와서 게를 잡느랴고 불야성을 이뤘는데 요즘에는 오징어 배가 불야성(不夜城)을 이루듯이 그랬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배가 다리역할을 했다 해서 주교(舟橋)라고 저쪽 부월리를 주교리라 불렀답니다. 그런데 소야팔경 중에 주교야화(舟橋夜火)란 말도 그때 그 불이 아주 꽃같이 밤에 피니까 주교밤꽃이라고 소야팔경에 들어 있습니다.
지금은 참 뭡니까? 옛날보다 기후가 좀 뜨셔져서 그렇지 옛날에는 30년전만 해도 청초호가 많이 얼었습니다. 얼때 바람이 심하지 않습니까? 양강지풍(襄江之風:양양·강릉은 바람이 심함)이라해서 바람이 심하니까 그 얼때 마치 파도 물결이 치듯 바람이 부니까 논밭을 갈은 것 같이 보이거든요. 그래서 용경(龍耕), 용갈이라고 불러왔답니다.
<박익훈, 남·77, 교동, 1992. 4. 21>
16. 청호동 갯배
갯배가 여기 피난민들이 많이 정착하고 그러다 보니까 이 반도처럼 생겼고 이 뒤로 육지로 돌아 갈라카면은 한 10리, 15리 거리가 되니까, 그리 거기서 보면은 불과 한 100m 거리밖에 안 되니까 거기서 갯배를 마련해 가지고 줄을 땡겨 가지고 왔다갔다 하면은 시내에 아주 쉽게 갈 수가 있거든.
그거가 여기 피난민들이 정착하면서부터 생긴건데 언제쯤 될까? 53년, 그러니까네 여기에 피난민들이 집결되서 살고 하니까네 한 60년대 뭐 그 쯤되어서 아마 갯배가 마련됐을 거야
<황화수, 남·75, 청호동, 1999. 12. 4>
17. 청호동 성황제
성황당은 요가면 있는데 조 앞에 가면 바닷가 쪽에 조 높은 산 위에다 있잖아 놨는데, 성황당이란 거는 옛날 고래 풍습이지. 신을 믿고 그 성황당이라는 거는 이 육지에 사는 사람들도 성황당 신을 많이 믿어.
“그저 고기라도 많이 잡아주쇼”
하고 1년에 한 두 번씩 거기에 가서 제사를 모셔. 거기에 가서 기도하고 그렇게 하는게 성황당이여. 1년에 한 번씩 거기에서 제사를 모시고 그러지.
옛날에 도감도 맡아보았는데, 옛 풍습에 의하면 성황제라 하면 주로가 전체 동민들이 모여가 하는 기 원칙이지마는 여기에 당시에 풍습으로 보면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 어업을 경영하는 선주들이 돈을 내고, 제물을 갖추고 굿도 하고 소도 잡고, 옛날에는 두 마리씩 잡고 했는데, 그기 동 전체의 부담은 아니었어요. 그런 형태로, 어업을 경영하는 선주들이 주로 돈을 모아서 지냈지요.
<황화수, 남·75, 청호동, 1999. 12. 4>
18. 청호동 유래
왜 청호동이라고 하는냐 청호동이 말이지 앞에 이 청초호가 있잖아 청초호를 이렇게 움싸고 있으니까 맑은 호수를, 푸른 호수를 가지고 있다 이래서 청호동이라고 아마 이름이 붙었을 것 같아요. 그런 거는 여기에 전부가 반도처럼 생긴 일종의 속초지역을 봐서는 반도 형태지마는 일종의 섬과 같이 좀 거리가 시내하고는 동떨어진 그런 면이 있어서.
그래 저 갯배가 댕기고 그 동민의 편의를 위해서 그렇게 했고, 여기가 백사지 땅이고 국유지인데 피난나온 사람들이 고향을 빨리 갈까 해가지고 38선 가차이에 혹 빨리 수복이 되면은 찾아갈까 해서 또 이북에서 바닷가에서 살던 사람들이 자기가 고 순간이래도 살라면은 아는 직업을 택해야 되고 바닷가에 이북에서 피난 나온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여기 와서 바닷가에서 뭔가 종사를 해야 생계유지가 되니까 고기잡이가 주축이니까 여기 와서 고기잡이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이 바닷가에 여기에 정착을 한 거지. 그래서 여 청호동이라는 곳은 그런 사람들이 거의 집결되어 가지고 살다보니까네 여기 주로 함경도 분들이 많고, 이래서 한때는 ‘아바이 마을’이라고 했어요.
이 ‘아바이’라는 것은 함경도에 가면은 영감님이라든가 나이 먹은 사람을 ‘아바이’라 이러카거든. 그래 ‘아바이 마을’이라고 호칭이 붙을 정도로 그렇게 해서 이렇게 된거야.
<황화수, 남·76, 청호동, 1999. 12. 4>
19. 도문동 유래
조선시대에는 도문면이라고 하여, 그 관할 하에 상도문리, 하도문리, 물치리, 대포리, 옹진리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도문은 동리 이름이자, 동시에 면이름이었지요.
그러던 것이 일제 시대에 들어와서 도문면과 소천면이 합쳐져서, 오늘날 속초시의 전신인 도천면이 되었고, 동시에 상도문리와 하도문리 중간에 행정상 중도문리가 신설되었어요. 그 후 1963년 속초가 시로 승격되었고, 1966년 동제를 실시할 때 상도문리, 중도문리, 하도문리가 합쳐져서 도문동이 되었지요.
도문이란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명이 있어요. 신라 때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양양군 강현면 강선리에서 신선의 안내를 받아 설악산 쪽으로 가는데 이곳에 이르자 갑자기 숲 속에서 맑고 우아한 소리가 들리는데, 마치 무상무아의 불법을 아뢰는 듯하여, 법장을 멈추고 서 있다가 홀연히 크게 깨달아 도통의 문이 열렸으므로, 이때부터 이곳을 도통의 문이 열린 곳이라고 하여 도문이라고 해요.
또 하나는 양양군 강현면 강선리에 내려온 신선이 이곳에서 설악산으로 가는 길을 물어, 와선대에서 누워 놀다가, 비선대에서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고 설명하면서, 이곳에서 길을 물었으므로 이곳은 道問이라고 하던 것이 도문(道門)으로 변하였다는 것이예요. 또 다른 하나는 수도객들이 도를 닦기 위해 설악산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라 하여 도문이란 이름이 생겨났다고 해요.
<김근수, 남. 78, 하도문, 1999. 11. 23>
20. 도문동 유래
도문동지역 거기엔, 문중이 많이 형성돼있어요. 도문 이씬가, 강씬가, 내가 정씨는 잘 모르겠는데 그쪽에 그게 있어요, 집성촌 비슷하게 있었다가 집성촌이 있기 때문에 그쪽에 굳이 뿌리는 그쪽으로 볼 수 있는데 속초같은 경우는 도문동이 양양하고 연계해갔고, 원래는 양양지역이니깐 큰 근간이 될만한 것은 도문동이죠.
세월이 흘러가면서 도시의 핵이 이쪽부터 시작됐으니까 사장이 되버린 어떤 그런 경우가 있고 그거와 같이 병행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척산마을하고 그 다음에 노리마을 그쪽이 군사적인 어떤 그 군사도시로서 그래도 발달할 수 있는 것이 시대 역사적으로 본다면 조선시대 후기고 일제시대로 가서는 일제강점 하에 있을 때 군사적인 군사항으로서의 필요성이 아주 강해지기 때문에 대포항이 그러다 보니깐 이쪽에 대한 어떤 중요성이 커져 버린거죠.
그래서 조선후기에서부터 대포항과 연계가 된거죠. 결국은 그래서 도시가 그런 특성을 가지고 발전해 간거죠. 풀이 많다는 점에서 갈대 노(蘆) 자를 쓰는데 접때 누가 왔을 때도 그런 얘길 했는데, 속초 옛 이름을 속세라고 하는게 뭐냐면 묵을 속(束)자에다 갈대를 묶는다는 그런 의미거든요. 억쇄라든가 갈대의 종류 대쇄를 묶는다는 그런 의미에서 지금 실제 속초의 이름은 풀초(草) 자를 묶을 속자(束)에다 풀초(草)자를 쓰는데 그런 의미에서 결국은 같은 의미에서 그렇게 나온 건데 속초지역이 풀이 많았나 봐요.
그래서 옛날 영랑호에 대한 전설을 보게 되면 그 영랑호에서 화랑 영랑이 여기서 이제 쉬었다는 그런 측면도 있었지만 옛날 신라시대때 부터는 말이 먹이는 곳으로 아마 발전이 되어왔지 않은가 하는 측면이 있어요. 뭐 개략적으로 그렇게 설명을 해봤는데 많은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김철환, 남·37, 노학동, 1999. 11. 20> 1. 23>
11. 영랑호 용이야기
옛날에 용이 하나 있었어. 그 용은 승천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용이었어. 그 용은 여의주를 달밤에 아가리에서 빼내 가지고 달빛을 비추어야 했지.
그런데 그곳에는 여의주를 노리는 이무기가 한 마리 있었거든. 어느 날 용이 잠시 한 눈을 판 사이에 이무기가 여의주를 눈 깜짝할 새에 삼켜 버렸지. 그래 가지고 용이 된 이무기는 승천을 하고 남은 용은 자신의 여의주를 빼앗아간 이무기를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지. 그때 흘린 눈물이 고여 생긴 것이 영랑호였어.
<이상기, 남·41, 금호동, 1999. 12. 17>
12. 영랑호 전설
영랑이라는 화랑이 와서 수도를 하고 놀다 갔다해서 영랑호라 하지요. 사실은 이 영랑이라든가 술랑이라든가 남랑이라든가, 이건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또는 화랑도 한 팀의 이름이다.
근데 숙종 때 김삼연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분이 자기 아버지 때 높은 관직에 계셨는데 율곡 선생하고 같은 시대야.
양반의 자손으로써 지켜왔기 때문에 백담사에서 조금 가다보면 그게 왜 영시암이라 했냐하면 화살을 한번 쏴 노면 영원히 못 돌아온다 해. 나는 여기 앉아 있으면 안돌아 간다 그래서 영시암이라 한다.
그 양반이 영랑호에 와서 글을 썼는데 경치가 좋아 놀다 가려니 경치가 너무 좋아서 사흘을 통곡하고 갔다는 글이 있지.
그렇게 영랑호의 경치가 좋아서 나도 맨 처음엔 깜짝 놀랬어. 또 요즘도 처음와서 영랑호를 처음보는 사람은 탄복않는 사람이 없소. 내가 예전에 영랑호를 자주 댕겼거든요.
근데 어떤 청년 한 명이 가며 한다는 말이
“아저씨 이 호가 뭐래요? 이야 이렇게 좋은 호수에 왜 사람이 없소?”
“외진 곳이라 사람이 안와서 그렇지.”
그렇게 처음 보는 사람은 탄복을 하지.
근데 여기 청초호는 쌍성호라 했어. 『동국여지승람』에 쌍둥이로 이루었다, 왜 그러냐 하며 내가 생각해 볼 때 영랑호는 화랑이 왔다갔다해서 영랑호라는 이름을 받았거든. 근데 저게 이름을 못 받았다 이거야.
근데 호수가 쌍둥이처럼 생겼거든. 쌍성호라고 붙였겠느냐. 근데 청초호도 『동국여지승람』에 뭐라 써있냐 하면 경치가 얼매나 아름다운지 영랑호보다 났다 그래서 『택리지』를 쓴 이중환이가 관동팔경에 낙산사를 안 넣고 청초호를 넣어서 유명해 졌다고.
청초호에는 옛날에 용암이라는 속초 교동 앞에 가면 바위가 큰 게 있었어요. 그 바위가 이름이 난 것은 한말에 남궁억 선생이 양양군수와 있었거든요. 우리나라가 한일 합방직전에 그때 와 있었어요. 애국자니까 이 양반이 사월 초파일에 화전놀이를 해서 더욱 이름이났다 이거여.
그때 이 대포동이 아주 이 부근에서 중심지였는데 왜냐 하면 그 항구가 이 부근에서 제일 수심이 깊다 이거야. 그러니까 이 부두에 하까다라는 배가 우편물을 싣고 사람도 태우는 그런 배가 있는데 거기를 떠나 대포를 들러서 원산까지 댕겼지.
그래서 교통이 편리해서 대포가 중심지였어요.
대포를 중심으로 해서 미시령으로 넘어가는 육로가 있고 배가 수로를 그렇게 댕기고 육로는 거기서 인제 회암산을 타고 원산으로 통하고, 그렇게 인제 교통이 편리하다 이렇게 쓰여 있어요.
영랑호는 영랑이란 화랑도가 지나갔다. 그런데 그걸 자세히 보면 영랑도이니까 영랑도가 한 개인이 아니라 단체로 해석되고, 결국 화랑이 수도했다는 역사에 의해 영랑호라고 지었다고 볼 수 있지.
<박익훈, 남·84, 교동, 1999. 12. 1>
13. 영랑호와 달마대사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에 신라시대 화랑인 영랑(永郞), 술랑, 삼조, 남석등이 금강산으로부터 고성 삼일포에 와서 3일동안 수련을 하고 각각 분산했습니다. 영랑만이 이 호수에 와서, 뱃놀이를 하며 선유하던 곳이라 해서 이 호수의 이름이 영랑호라 불리어 왔습니다.
영랑호 남쪽 기슭에 송림이 울창한 복판에 자그마한 사찰이 하나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서기 637년전에 정혁담이라는 승려가 사지를 건립하고 53불의 보광부처를 보완하였다고 해서 보광사(普光寺)라고 이름이 불려왔습니다.
그리고 영랑호는 아주 물결이 맑고 잔잔해서 언제나 어족이 풍부하며 낚시를 즐기는 태공(太公)들과 뱃놀이를 즐길 수 있는 좋은 속초 시민의 휴식처가 바로 영랑호입니다.
그럼 영랑호를 떠나서 유래를 마치고 그전에부터 불교가 맨 처음에 어디서부터 번성했나 하면 인도에서부터 번성했는데, 인도에서부터 번성하면, 당나라 동남사, 지상사, 원나라 윤재사, 개국사를 거쳐서 금강산으로부터 금강산 신개사, 유점사 장안사 3개 사찰을 거쳐 가지고, 이 영동지구 관동8경을 쭈욱 내려 오는 그 승려가, 원래는 승려가 말을 탔다고 하면 위법적이지만, 그러나 거리가 워낙 멀고 보니 어딘가는 그 아주 말먹이가 무성하게 자라 있고 그 꼭 말 먹이를 했으면 좋겠어서 말에서 내려서 풀을 비어서 말을 먹일라고 풀을 비어서 등에다 싣고 말을 타고 올라와 보니 점심 때가 되었어요.
시장끼가 있어 하는 것 같아서 그 풀단을 풀어 가지고 말을 먹이고 그래 ‘먹이재’라 하는 데가 오늘날에 와서 그 풀단을 풀어서 먹였다고 해서 먹이재입니다.
그래 먹이재를 거쳐서 이 봉우리 꼭대기를 올라와 보니 인도에서부텀 포도 전법이 부족한 지라 여기서 수 년간 수도를 해야 되겠다 해서 그 바위 틈에서 수도를 수 년간하고 그래서 거기서 도(道)가 통했어요. 그 포도 전법을 통달을 해서 그분이 그제서 도가 통했다고 해서 이를 ‘달마봉’이라 불렀고, 달마대사가 바로 이 분입니다.
<유만석, 남·50, 설악동, 1981. 4. 17>
14. 청초호 용경(龍耕)
청초호에 대해서는 청초호를 중심으로 해서 그러한 경이 나오는가 하면은 청초호가 또 한가지는 옛날에는 그 겨울에는 호가 업니다. 어는데 얼음을 보고서 그 다음해의 농사를 풍흉을 그 점쳤다고 하는데, 그건 어떻게 보는가 하면은 얼음이 어는 것이 꼭 논을 갈아 논 것같이 그런 얼음이 업니다.
그걸 갖다고 용경(龍耕), 용갈이, 용이 논을 갈아 놓았다는 듯이 용경이라고 부르는데, 그래서 인제 그 용경이 누워 있는 방향을 보고, 그 해에 농사가 잘 되겠다 못 되겠다 하는 것을 아마 점쳤다. 그래서 그와 같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청초호이면서 이 청초호는 앞으로에 우리 속초로 봐서는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해야 된다는 것이죠. 이쪽에 남을 향해서 갈아 났을 때 풍년이 들고, 북으로 향해서 엇갈이로 갈아 놓았을 때는 흉년이 든다. 그래서 남북을 나눠서 길흉을 점쳤어요.
<장헌영, 남·54, 중앙동, 1981. 4. 27>
15. 청초호와 민속
청초호를 쌍성호라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쌍성호라 했냐하면 영랑호하고 청초호하고 호수가 둘이기 때문에 쌍둥이 이기 때문에 쌍성호라 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청초호 호수 가운데 청룡이 살았다 해서 청초호라 하고 영랑호는 황룡이 살았다 해서 황호라고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영랑호라면 기록에 엄연히 영랑(永郞)이란 게 남아있고 또 이쪽은 쌍성호라고 남아 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할 때는 같은 호수인데 영랑호는 이미 이름을 얻었고, 청초호는 이름을 못 얻었기 때문에 부득이 그렇게 썼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청초호에서는 무슨 놀이가 있었나 하면 논뫼호의 불꽃놀이, 논산을 우리말을 하면 논뫼가 됩니다. 뫼 산(山)자니까 지방사람들이 그 당시에 청초호를 논뫼호라고 불렀다 이겁니다.
그런데 옛날 봉건시대에는 높은 사또가 부임하면 지방사람들이 그 사또에게 잘 보일려고 환영식을 하는데 여기서 해 왔다는 것입니다.
해왔는데, 남궁억 선생 때까지도 그런 것이 있었다 그런 얘깁니다. 그 다음에 남궁억 선생(1863∼1939) 그 다음에 최모 씨던가 그 양반때 일본에 우리나라를 빼앗겼거든요. 그래 없어졌는데 왜 없어졌냐하면 그런 불꽃놀이 하다가 빠져 죽은 익사사고가 생겼다. 그래 없어졌는데 이런 일을 해서는 안되겠다. 일본사람들이 우리의 풍속을 없애려던 차에 호기가 됐고 한가지는 여기 용암이란 바위가 있었답니다.
그 길이가 구척이나 된다고 써있습니다. 그런데 남궁억 선생이 4월 초파일에 이 지역사회분들과 거기서 술을 나누면서 얘기를 했다. 일본사람들이 쓴 글이니까 주연을 베풀었다. 그래서 청초호가 한층 더 이름이 높이 났다. 그렇게 써 있습니다.
그런 바위를 항구를 만드느랴고 그 바위를 깼습니다. 박상희란 분이 청초호를 개항하기 전까지만 해도 바다 게가 얼마든지 많았는지 사람들이 가을철만 되면 밤에 횃불을 켜들고 쭉 와서 게를 잡느랴고 불야성을 이뤘는데 요즘에는 오징어 배가 불야성(不夜城)을 이루듯이 그랬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배가 다리역할을 했다 해서 주교(舟橋)라고 저쪽 부월리를 주교리라 불렀답니다. 그런데 소야팔경 중에 주교야화(舟橋夜火)란 말도 그때 그 불이 아주 꽃같이 밤에 피니까 주교밤꽃이라고 소야팔경에 들어 있습니다.
지금은 참 뭡니까? 옛날보다 기후가 좀 뜨셔져서 그렇지 옛날에는 30년전만 해도 청초호가 많이 얼었습니다. 얼때 바람이 심하지 않습니까? 양강지풍(襄江之風:양양·강릉은 바람이 심함)이라해서 바람이 심하니까 그 얼때 마치 파도 물결이 치듯 바람이 부니까 논밭을 갈은 것 같이 보이거든요. 그래서 용경(龍耕), 용갈이라고 불러왔답니다.
<박익훈, 남·77, 교동, 1992. 4. 21>
16. 청호동 갯배
갯배가 여기 피난민들이 많이 정착하고 그러다 보니까 이 반도처럼 생겼고 이 뒤로 육지로 돌아 갈라카면은 한 10리, 15리 거리가 되니까, 그리 거기서 보면은 불과 한 100m 거리밖에 안 되니까 거기서 갯배를 마련해 가지고 줄을 땡겨 가지고 왔다갔다 하면은 시내에 아주 쉽게 갈 수가 있거든.
그거가 여기 피난민들이 정착하면서부터 생긴건데 언제쯤 될까? 53년, 그러니까네 여기에 피난민들이 집결되서 살고 하니까네 한 60년대 뭐 그 쯤되어서 아마 갯배가 마련됐을 거야
<황화수, 남·75, 청호동, 1999. 12. 4>
17. 청호동 성황제
성황당은 요가면 있는데 조 앞에 가면 바닷가 쪽에 조 높은 산 위에다 있잖아 놨는데, 성황당이란 거는 옛날 고래 풍습이지. 신을 믿고 그 성황당이라는 거는 이 육지에 사는 사람들도 성황당 신을 많이 믿어.
“그저 고기라도 많이 잡아주쇼”
하고 1년에 한 두 번씩 거기에 가서 제사를 모셔. 거기에 가서 기도하고 그렇게 하는게 성황당이여. 1년에 한 번씩 거기에서 제사를 모시고 그러지.
옛날에 도감도 맡아보았는데, 옛 풍습에 의하면 성황제라 하면 주로가 전체 동민들이 모여가 하는 기 원칙이지마는 여기에 당시에 풍습으로 보면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 어업을 경영하는 선주들이 돈을 내고, 제물을 갖추고 굿도 하고 소도 잡고, 옛날에는 두 마리씩 잡고 했는데, 그기 동 전체의 부담은 아니었어요. 그런 형태로, 어업을 경영하는 선주들이 주로 돈을 모아서 지냈지요.
<황화수, 남·75, 청호동, 1999. 12. 4>
18. 청호동 유래
왜 청호동이라고 하는냐 청호동이 말이지 앞에 이 청초호가 있잖아 청초호를 이렇게 움싸고 있으니까 맑은 호수를, 푸른 호수를 가지고 있다 이래서 청호동이라고 아마 이름이 붙었을 것 같아요. 그런 거는 여기에 전부가 반도처럼 생긴 일종의 속초지역을 봐서는 반도 형태지마는 일종의 섬과 같이 좀 거리가 시내하고는 동떨어진 그런 면이 있어서.
그래 저 갯배가 댕기고 그 동민의 편의를 위해서 그렇게 했고, 여기가 백사지 땅이고 국유지인데 피난나온 사람들이 고향을 빨리 갈까 해가지고 38선 가차이에 혹 빨리 수복이 되면은 찾아갈까 해서 또 이북에서 바닷가에서 살던 사람들이 자기가 고 순간이래도 살라면은 아는 직업을 택해야 되고 바닷가에 이북에서 피난 나온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여기 와서 바닷가에서 뭔가 종사를 해야 생계유지가 되니까 고기잡이가 주축이니까 여기 와서 고기잡이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이 바닷가에 여기에 정착을 한 거지. 그래서 여 청호동이라는 곳은 그런 사람들이 거의 집결되어 가지고 살다보니까네 여기 주로 함경도 분들이 많고, 이래서 한때는 ‘아바이 마을’이라고 했어요.
이 ‘아바이’라는 것은 함경도에 가면은 영감님이라든가 나이 먹은 사람을 ‘아바이’라 이러카거든. 그래 ‘아바이 마을’이라고 호칭이 붙을 정도로 그렇게 해서 이렇게 된거야.
<황화수, 남·76, 청호동, 1999. 12. 4>
19. 도문동 유래
조선시대에는 도문면이라고 하여, 그 관할 하에 상도문리, 하도문리, 물치리, 대포리, 옹진리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도문은 동리 이름이자, 동시에 면이름이었지요.
그러던 것이 일제 시대에 들어와서 도문면과 소천면이 합쳐져서, 오늘날 속초시의 전신인 도천면이 되었고, 동시에 상도문리와 하도문리 중간에 행정상 중도문리가 신설되었어요. 그 후 1963년 속초가 시로 승격되었고, 1966년 동제를 실시할 때 상도문리, 중도문리, 하도문리가 합쳐져서 도문동이 되었지요.
도문이란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명이 있어요. 신라 때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양양군 강현면 강선리에서 신선의 안내를 받아 설악산 쪽으로 가는데 이곳에 이르자 갑자기 숲 속에서 맑고 우아한 소리가 들리는데, 마치 무상무아의 불법을 아뢰는 듯하여, 법장을 멈추고 서 있다가 홀연히 크게 깨달아 도통의 문이 열렸으므로, 이때부터 이곳을 도통의 문이 열린 곳이라고 하여 도문이라고 해요.
또 하나는 양양군 강현면 강선리에 내려온 신선이 이곳에서 설악산으로 가는 길을 물어, 와선대에서 누워 놀다가, 비선대에서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고 설명하면서, 이곳에서 길을 물었으므로 이곳은 道問이라고 하던 것이 도문(道門)으로 변하였다는 것이예요. 또 다른 하나는 수도객들이 도를 닦기 위해 설악산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라 하여 도문이란 이름이 생겨났다고 해요.
<김근수, 남. 78, 하도문, 1999. 11. 23>
20. 도문동 유래
도문동지역 거기엔, 문중이 많이 형성돼있어요. 도문 이씬가, 강씬가, 내가 정씨는 잘 모르겠는데 그쪽에 그게 있어요, 집성촌 비슷하게 있었다가 집성촌이 있기 때문에 그쪽에 굳이 뿌리는 그쪽으로 볼 수 있는데 속초같은 경우는 도문동이 양양하고 연계해갔고, 원래는 양양지역이니깐 큰 근간이 될만한 것은 도문동이죠.
세월이 흘러가면서 도시의 핵이 이쪽부터 시작됐으니까 사장이 되버린 어떤 그런 경우가 있고 그거와 같이 병행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척산마을하고 그 다음에 노리마을 그쪽이 군사적인 어떤 그 군사도시로서 그래도 발달할 수 있는 것이 시대 역사적으로 본다면 조선시대 후기고 일제시대로 가서는 일제강점 하에 있을 때 군사적인 군사항으로서의 필요성이 아주 강해지기 때문에 대포항이 그러다 보니깐 이쪽에 대한 어떤 중요성이 커져 버린거죠.
그래서 조선후기에서부터 대포항과 연계가 된거죠. 결국은 그래서 도시가 그런 특성을 가지고 발전해 간거죠. 풀이 많다는 점에서 갈대 노(蘆) 자를 쓰는데 접때 누가 왔을 때도 그런 얘길 했는데, 속초 옛 이름을 속세라고 하는게 뭐냐면 묵을 속(束)자에다 갈대를 묶는다는 그런 의미거든요. 억쇄라든가 갈대의 종류 대쇄를 묶는다는 그런 의미에서 지금 실제 속초의 이름은 풀초(草) 자를 묶을 속자(束)에다 풀초(草)자를 쓰는데 그런 의미에서 결국은 같은 의미에서 그렇게 나온 건데 속초지역이 풀이 많았나 봐요.
그래서 옛날 영랑호에 대한 전설을 보게 되면 그 영랑호에서 화랑 영랑이 여기서 이제 쉬었다는 그런 측면도 있었지만 옛날 신라시대때 부터는 말이 먹이는 곳으로 아마 발전이 되어왔지 않은가 하는 측면이 있어요. 뭐 개략적으로 그렇게 설명을 해봤는데 많은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김철환, 남·37, 노학동, 1999. 11. 20> 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