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구비문학
1. 도문의 벼락바위
설악산에서 동해로 흐르는 강을 쌍천이라고 부른다. 도문고을 앞 쌍천에는 큰 바위가 있다. 그 바위는 중간이 갈라져 있고 우리의 삶을 지켜온 영험한 바위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으로, 이 바위를 벼락바위라고 부른다. 도문은 원래 부유한 고을로 설악산의 정기를 받았고 풍경이 아름답고 고요하여 문장을 즐기기에 적합하여 이름난 학자들도 많았다.
이 고을은 원래 설악의 영향으로 불교가 비교적 성한 곳이었다. 그럼으로 이 지역에는 불교와 관계된 담화가 많다. 도문 고을은 원래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풍수에도 최고의 장소이다. 이 고을의 산기슭에 牟거사라는 거사가 살았다. 이 거사는 출가는 하지 않았지만 불교의 도를 터득하고 살아가면서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그래서는 그는 자칭 모거사라고 하였다. 항상 승려와 같이 절제된 생활을 하였다. 채식을 하고 살생을 금하고 수도자의 길을 가면서 살았는데 그에게는 열대여섯 살 된 딸을 하나를 데리고 살았다.
그 거사는 매일 쌍천의 바위에서 낚시를 하며 소일을 하였다. 낚시에 고기가 잡히면 다시 물로 던져주고 이런 생활을 하며 지냈다. 그의 딸은 강에서 낚시하는 아버지 옆에서 시중을 들기도 하고 심심함을 풀어드렸다. 그런데 하루는 아버지가 낚시를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딸이 보니까 낚시를 고기가 물자 낚싯대가 움직였다. 그래서 아버지를 깨웠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 기색도 없이 다시 물에 놓아주었다.
이 때 낚시터에 한 승려가 나타났다. 이 승려는 파계승으로 이곳을 지나다가 모거사의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장난삼아 모거사를 만나 농을 시작하였다.
“소승 날이 저물어 하루 쉴 곳이 없으니 죄송스럽지만 거사님 댁에서 하루 묶었으면 합니다.”
정중하게 청했지만 거사는 들은 척도 안하고 계속 낚시만 열중하였다. 파계승은 서서히 오기가 생기고 화가 나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도를 터득한 거사라도 남의 말을 들어주지도 않는 못된 사람이구만 거만하기 짝이 없구나.”
생각을 하며 그 거사의 행동을 보니 말 한마디 없이 낚시에만 열중하고 자신에게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파계승은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거사 옆에서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다 거사를 무조건 따라갔다. 방으로 들어가기에 파계승도 따라 들어가 거사와 마주했지만 거사는 이유도 아무 말이 없었다. 왜 따라왔는지도, 어디에서 왔는지도, 어떻게 하라는 말 한마디 없었다.
그 때, 딸이 저녁상을 차려왔다. 저녁상을 보니 산나물에 감자를 넣고 죽을 만들어 죽 두 그릇을 가지고 들어왔다. 거사는 밥상이 들어오자 객에게는 신경도 안 쓰고 먹어보라는 말도 없이 혼자 두 그릇을 다 먹어버렸다. 파계승은 어쩔 수 없이 당하고는 괘씸한 생각에 화가 나기 시작하였다.
거사는 객에게는 관심도 없이 식곤증인지 피곤하지 벽에 기대여 눈을 감고 잠을 자기 시작하였다. 파계승은 분하고 무시하는 거사를 보며 복수를 하여 골려주고 싶었다. 이 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중이 거사를 깨웠다.
“거사님”, “거사님”
거사는 귀찮다는 듯이 눈을 겨우 뜨면서
“왜 그러는가”
“저는 아시다시피 이렇게 떠도는 중이지만 제가 여기에 온 것은 하나의 목적이 있어서요.”
“그래 무슨 목적에 왔는지 들어 봅시다.”
그랬더니 파계승이
“아주 귀한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자
“그 귀한 것이 무엇인가?”
“사실은 내가 귀한 부처님의 씨를 갖고 있습니다.”
거사는 파계승의 귀한 부처님 씨라는 말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부처님의 씨라...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의미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파계승은
“부처님의 씨를 갖고 있는데 저에게 밭을 하나 시주하시지요.”
모거사가 생각해 보니 참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나는 밭이라고 해 봤자 감자를 붙여 먹는 조그만 밭 한 뙤기가 전부인데 줄 밭이 없는데...”
“에이, 거사님, 훌륭한 밭이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는데...”
“무슨 소리 인고, 나에게 좋은 밭이 있더니... 나는 정말 좋은 밭이 없다네.”
“거사님, 아름다운 딸이 있지 않소.”
그때서야 거사는 파계승이 말하는 숨을 뜻을 이해하고 아주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당신은 파계하겠다는 말이오.”
“파계라니 당치 않은 소리요.”
그러자 파계승은 보따리를 슬금슬금 풀더니 상자하나를 거사 앞에 내어 놓으며
“이 상자 속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하오.”
정말 펼쳐보니 값진 보석이 가득하였다.
“이 보물들은 제가 부처의 씨를 그 밭에 심어서 얻은 종자로 하여금 절을 크게 짓고 그 절을 통하여 법연을 펼친 계획으로 쓸 재물이오. 그러니 딸을 저한테 주십시오.”
이자의 요구가 엉뚱하여 거사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시요. 당신에게 절대로 딸을 줄 수 없소.”
단호하게 거절하자
“그럼 좋습니다. 저하고 약속을 하나 하지요. 제가 여기서 밭을 얻지 못하면 이 많은 보화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저하고 약속을 하나 하시지요. 제가 이집을 중심으로 100장 이내에 이 금은보화의 상자를 숨겨 놓을 테니 제가 숨겨놓고 가서 100일후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거사님께서 도를 닦으신 분이니까 이 보화를 찾게 되면 저는 서사님의 도에 눌리고 진 사람으로 보화는 거사님 것이고, 만약에 거사님이 보화상자를 찾지 못하면 거사님 딸을 제에게 시주하십시오.”
거사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집을 중심으로 100장이라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거사는 중과 내기를 하면 무엇이든 이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거사는
“좋다.”하고. 자신 있게 약속을 하였다.
그날 밤 그 파계승은 보물상자를 어딘가에 숨겨놓고 사라져 버렸다.
그 다음날부터 그 거사는 파계승과의 약속을 딸에게 말하고 보물상자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 나섰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좋아하던 낚시도 그만두고 보화상자를 찾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거사는 보물상자를 탐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사랑스런 딸을 파계승에 빼앗긴다는 생각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 모습을 딸이 지켜보며 아버지의 모습에 마음이 무척 아팠다. 보화를 찾다가 99일이 지나갔다. 거사는 찾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한탄을 하며 자포자기 하였다.
그러면서 딸에게
“내가 너무 경솔했구나. 내가 도를 닦으며 평생을 살아왔는데 자신의 딸 하나도 구할 수 없다니 나의 도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너를 저 중놈에게 빼앗겨야 하다니, 미안하다.”
“내가 조그만 도를 배워 자만한 결과다. 내 도가 너무 보잘 것이 없구나.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설악산으로 들어가 도를 더 닦아야겠다.”
고 말하고는 설악산으로 입산하였다.
딸은 아버지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면서 말릴 수도 없고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딸은 그 자리에서 잡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를 시작하였다. 정성스럽게 몸과 마음을 하나로 모아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어두워지나 아버지를 위해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하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먹구름이 밀려오더니 천둥번개가 치고 동천개벽 하는 쾅소리가 아버지가 매일 낚시하던 바위에 벼락 치는 것이었다. 처녀가 그 바위에 가보니까, 벼락을 치자 그 큰 바위가 깜짝 놀라서 쩍하고 반으로 갈라졌다. 그런데 그 안에는 파계승이 숨겨놓았던 보상자가 나타났다.
그 바위를 사람들은 벼락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복은 딸의 효심에 감복하여 하늘이 내려준 고귀한 보답이라고 칭송하였다. 지금도 그 바위는 이러한 담화를 간직한 채 설악산을 굽어보며 동해로 흐르는 물을 장엄하게 지켜보고 있다.
2. 울산바위 전설
울산바위는 설악산을 대표하는 바위로 그 웅장함은 대단하다. 그런데 왜 설악바위라 하지 않고 울산바위라고 하냐면 그 유래는 이렇다.
조물주가 천하제일의 명산을 금강산에 만들기로 하고 전국에 있는 웅장하고 풍유스러운 산봉우리를 뽑아서 1만 2천봉의 천하 명산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래서 전국에 있는 바위들에게 금강산으로 모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울산에 있는 바위는 항상 자신의 모습에 자만하고 있었다. 자신의 모습이 장엄하고 웅장하여 세상에서 최고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조물주의 이야기를 듣고 금강산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울산의 바위가 떠나면서 주위의 바위들에게
“나는 본시 장엄한 바위로 이곳에 있을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명성이나 빛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멋진 바위들과 웅장함을 겨를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금강산으로 떠난다.”
이렇게 호언장담을 하고 울산을 떠났다. 이 바위는 너무 큰 바위라 빨리 달릴 수도 빨리 걸을 수도 없었다. 다른 바위들은 달려가지만 울산의 바위는 그럴 수 없었다. 말이 바위지 이 바위는 바위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산이었다. 이 거대한 바위는 걷는 것에 지쳐가고 있었다. 울산의 바위는 산맥을 따라 걸으면서 후회하기도 하였다.
너무 힘들고 어려운 여정이었다. 온 힘을 다해 금강산으로 길을 재촉하였지만 힘이 들어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되어 기진맥진하였다. 울산의 바위가 기를 쓰고 온 곳이 바로 설악산이었다. 빨리 가서 좋은 자리를 잡고 자신의 모습을 뽐내고 싶었다. 긴 여정으로 울산의 바위는 더 이상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바위는 조금 쉬어가기로 했다. 이왕 쉴려면 풍광 좋은 곳에서 쉬기로 하였다. 그곳은 웅장한 설악산과 아름다운 바다가 보이는 풍유스러운 곳이었다. 지금의 울산바위 자리에서 쉬게 되었다.
편안하게 쉬고 있는데 조물주가 1만 2천봉을 다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1만 2천봉이 들지 못한 바위들은 모두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울산의 바위 실망이 말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형상에 자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조물주가 자신을 보면 높이 평가하여 중요한 자리를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물주를 찾아갔다.
조물주에게 예를 갖추고 나서
“조물주님 저는 웅장하여 빨리 걸을 수 없어 다소 늦었습니다. 저를 보시고 금강산에 좋은 자리를 내어주십시오.”
조물주는 울산의 바위를 살펴보더니
“형상은 금강산을 빛내고도 남음이 있으나 이미 금강산을 모두 이룬 후라 나도 어쩔 수 없게 되었구나.”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그러자 조물주는
“설악산은 너의 형상이 너무 커서 자리 할 곳이 없다 그러나 다른 좋은 산으로 가서 멋스러움을 자랑 하거라”
하였다.
이 소리를 듣고 울산의 바위는 화도 나고 자존심이 상하여
“저도 자존심이 있소.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가겠소.”
하지만 울산의 바위는 고향의 바위들에게 허풍도 떨어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에 금강산에 물러 나오며 설악산을 생각하게 되었다. 웅장한 산과 아름다운 동해 바다를 굽어 볼 수 있는 설악산에서 자신의 형상을 뽐내고 싶었다.
그래서 울산바위는 설악산으로 돌아와 울산으로 돌아가지 않고 설악산에서 그 장엄함을 뽐내고 있다.
3. 울산바위와 동자승
설악산의 울산바위는 그 장엄함을 뽐내고 있다. 그래서 많은 풍류객들이 이곳을 많이 찾았다. 그런데 울산의 원님이 풍유차 설악산에 왔다가 울산바위의 유래를 듣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울산바위를 둘러보니 정말 장엄하고 멋스러웠다. 이에 울산 원님은 마음이 아팠다. 울산에 이런 웅장한 바위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찾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그 모습이 이곳에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이에 배가 아팠다. 그래서 설악산에 대한 시기심도 있고 해서 스님들을 골려주고 싶었다.
다음날 원님은 많은 생각을 한 후에 설악산 중들을 괴롭힐 생각에 신흥사로 찾아가 주지승을 찾았다. 조선조는 배불숭유정책으로 불교가 유교보다 비교적 천시 받던 시기였다. 주지승은 원님의 행차에 예를 갖추었다. 원님 다짜고짜
“나는 울산의 원님인데 왜 울산의 장엄한 바위를 설악산에다 갔다 놓아 풍경이 더욱 아름답고 이로 인해 설악산과 사찰을 찾는 사람도 많은데 세금 한 푼 내지 않는냐! 못된 놈들이구먼.”
그때는 스님들이 힘이 없을 때라 꼼짝 없이 당하고 있었다.
원님은 다시
“내 너희들이 몇 해가 지나도 세금을 내지 않아 내가 오늘은 직접 세를 받으러 왔으니 당장 준비하도록 하여라.”
호통을 쳤다.
스님들은 당시 사회가 불교를 배척하는 시기라 원님에게 기도 펴지 못하고 아무 변명이나 말도 못하고 세를 바치기로 하였다. 그 다음해부터 울산에서 세를 받아가기 시작했다. 절의 살림살이는 세금으로 어려워졌고 농사를 지어도 다 뜯어가니까 주지는 걱정이 말이 아니었다.
“울산에서 또 세를 받으러 올 텐데...”
하고 땅이 꺼져라 근심을 하니까 이것을 다 지켜본 동자승이
“스님, 무엇 때문에 요즈음 그렇게 근심걱정을 많이 하십니까?”
“너는 몰라도 된다. 너가 알면 걱정만 될 것이다. 그러니 알려고 하지 마라.”
“스님, 그러시지 말고 제게 말을 해 주십시오. 혹 제가 문제를 해결할 지 누가 알겠습니까?”
동자승이 자꾸 애원을 하니까 주지스님이 동자승이 생각했던 대로 울산바위의 세금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
“스님, 뭐 그런 것을 가지고 걱정하십니까? 그 문제를 저에게 맡기시면 제가 다 해결하겠습니다. 이번에 울산에서 세를 받으러 오면 저에게 이야기 해주시면 제가 다 해결하겠습니다.”
주지승은 기특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세를 받으러 오는 날 주지승과 스님들은 절을 피하고 동자승만 남겨 놓았다.
고을 원님이 보낸 사람들이 세를 받으러 절로 들이 닥쳤다. 주지승을 찾자 동자승은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맞이하였다.
“울산 원님이 시켜 울산바위 세를 받으러 왔으니 빨리 주지승을 불러 오너라.”
“바위 세를 받으러 오셨다구요.”
“우리는 바위 세를 낼 수 없습니다.”
“뭐야 당장 주지를 불러 오지 않으면 혼을 내야겠다.”
“말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 사찰에서는 그 동안 억울하게 세를 냈습니다. 지금까지는 어쩔 수 없고 올해부터는 세를 낼 수 없다고 원님께 전해주십시오.”
어린 동자승은 지혜롭게 이야기를 풀어 갔다. 그러자 원님의 사자들은
“설악산에서 울산바위가 풍광을 아름답게 하였으니 당연히 세금을 내야지 무슨 말인가?”
“사실, 저 바위가 있어 우리 사찰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지금 자 바위로 인해 많은 손해를 보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거대한 바위가 사찰에 자리하고 있어 풀 한 포기 나무 한그루 자라지도 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올해부터는 그 바위를 가지고 가지 않으시면 저희가 세를 받아야 겠습니다. 울산바위를 가지고 가시든지, 세금을 내시든지 하십시오.”
원님의 사자들은 큰일이 났다. 세금은 고사하고 도리어 세를 주어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 날 다시 와서 이야기 하자며 돌아갔다. 다음날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너 말대로 울산바위를 가지고 갈 테니 옮겨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해 주어야겠다. 네가 만약 가져가도록 준비를 하지 못한다면 울산바위를 우리에게 넘길 의사가 없다고 생각하고 세금을 그대로 받아야겠다. 어떻게 하겠느냐?”
동자승이 그들이 그렇게 나올 것을 알고 당당하게 망설임없이 이야기하였다.
“요구대로 하겠습니다.”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너희들이 울산으로 가지고 갈 수 있도록 재로 새끼를 꼬아서 울산바위를 묶어 놓아라. 그러면 우리가 갖고 가겠다.”
동자승은
“그렇게 하겠습니다. 재로 새끼를 꼬는데 시간이 필요하니 체류하는 곳을 일러 주시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이에 울산에서 온 원님의 사자들은 숙소로 돌아가면서 아무리 도를 터득한 자라도 재로 새끼를 꼴 수 없다면 비아냥거렸다.
주지승이 절로 돌아와 몹시 궁금하여 동자승에게 물어 보았다. 주지는 동자승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 지혜는 뛰어나지만 어떻게 재로 새끼를 만들어 울산바위를 맬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동자승은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동자승은 스님들과 고을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새끼를 꼬기 시작하였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새끼를 꼬아서 동자승이 시키는 대로 울산바위로 옮기게 되었다. 동자승이 시키는 대로 울산바위를 새끼로 묶고 그 새끼에 불을 붙이니 울산바위는 재로 꼬아 만들 새끼로 묶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울산에서 온 자들에게 연락하였다. 울산바위에 와 보니 재로 만든 새끼로 울산바위가 묶어져 있었다.
동자승이 그들을 보고
“이제 재로 꼬은 새끼로 울산바위를 묶어 놨으니 가지고 가시지요.”
이것을 보고 그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뒷걸음쳐 산을 내려가 울산으로 도망하였다.
동자승의 지혜로 울산에서 사찰로 세금을 받으러 오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울산바위에 가면 바위를 묶었던 흔적이 있다고 한다.
4. 파명당과 학사평
우리 민족은 예부터 명당자리를 중시하였다. 명당자리와 관계된 이야기가 노학동에 전해오고 있다. 이곳에 이름난 유명한 가문이 있었는데 이 가문은 대대로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하는 인사도 많았고 이름난 학자도 많은 명문거족이었다.
그런데 이 집안이 언제부턴가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도 없고 집안에 사람이 죽고 불길한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가문 사람들이 모여 집안의 일을 의논하면서 집안이 잘 안 되는 것은 묘 자리 때문이라고 하였다. 당시만 해도 풍수설을 상당히 믿고 있었다. 그래서 집안이 잘 안되면 묘자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집안사람들이 지관을 모시고 집안의 조상의 묘를 다시 정하기로 하였다. 지관을 모시고 조상의 묘를 보니까 음지여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그런데 묘를 옮기려고 파니까 봉분을 다 파고 관이 드러나자 학 두 마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학 두 마리가 날아올라서 한 마리는 북쪽을 향해 날아가고, 한 마리는 남쪽을 향해 날아갔는데 북쪽으로 향해 날아가 학사평(鶴沙坪) 고을에 앉았다. 그때 학사평은 모래밭이었다. 그래서 학사평이라고 하였다.
남쪽으로 날아간 학은 손양면 학포리(鶴浦里)로 날아갔다. 학포리로 날아가 그곳에 앉았다고 하여 학포리가 되었다.
이러한 파명당 이야기는 많은 지역에 전해오고 있다.
5. 권금성의 유래
설악산의 절경 중에 권금성은 일품이다. 이러한 권금성은 재미있는 전설을 갖고 있다.
아주 오랜 옛날 한 마을에 권씨 성의 장사와 김씨 성의 장사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이 쳐들어오자 산세가 험한 곳으로 피난하였다. 그곳의 지금의 권금성 자리이다. 적이 오자 방어할 길이 없어 서로 의논하였다. 그래서 두 장사가 그곳에 성을 쌓기로 하였다.
“적병이 오기 전에 성을 쌓아야 할 텐데...”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안에 성을 만들어야 화를 면할 것이오.”
하지만 성을 쌓는 다는 것이 결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의논 끝에 돌을 날라다가 이곳이 쌓기로 하였다. 하지만 먼 거리에서 돌을 날라다가 성을 쌓는 다면 몇 달이 걸릴 것 같았다.
두 장사가 궁리 끝에
“이렇게 합시다. 돌을 날라서는 성을 쌓을 수 없으니 내가 강에 내려가 돌을 던질 테니 당신은 여기서 받아서 성을 쌓으시오, 그래야만 하루 밤에 성을 다 쌓을 수 있을 것이요.”
“좋습니다.”
그래서 권장사가 강으로 내려가 돌을 주어서 던졌다. 그러면 김장사는 그 위에서 돌을 받아가지고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힘들면 서로 교대로 김장사가 강으로 내려가 돌을 던지고 권장사는 위에서 돌을 받아 성을 쌓았다.
이렇게 권장사와 김장사가 만든 성이라 權金城 이라고 부른다.
6. 계조암의 매미
계조암은 예부터 스님들이 도를 터득하기에 좋은 도량으로 많은 수도자들이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계조암 부근에는 매미가 많기로 유명하다. 특히, 계조암에서 듣는 매미들의 소리는 계곡에 울려 자연의 신비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계조암과 매미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옛날, 스님이 도를 닦기 위해 계조암에서 수도를 시작하였다. 스님의 일은 하루 종일 도만 닦고 그 외에는 잠자는 것이 전부였다. 스님은 도를 닦다가도 한 낮에 낮잠을 실컷 자고 일어났다. 그래서인지 밤에는 깊은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여름만 되면 한 밤에 불면증으로 고생을 하였다. 그 이유는 숲과 냇가에서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에 잠 못 들고 심한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스님은 아직 도를 터득하지 못해서인지 개구리 소리에 초연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개구리를 모두 찾아다니며 쫓을 수도 없고, 다 잡을 수도 없고 어쩔 수 없는 형편에 고민하게 되었다. 결국은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도를 터득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 도를 터득하지 못하여 여러 방법과 노력을 해 보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많은 방법과 연구와 비책을 통해서 마침내 개구리 울음을 그치게 하는 도술을 터득하였다.
그 여름부터 개구리가 울어대기 시작하자 부적을 만들어 던지자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멈추게 하였다. 그때부터 스님은 편안하게 밤잠을 푹 잘 수 있었다. 자신의 노력과 궁리를 통해 자신을 괴롭히던 자연물을 없애고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또 하나 있었다. 밤잠을 설치게 하던 개구리의 울음소리는 해결했지만 낮잠을 방해하는 매미소리는 또 하나의 방해물이었다. 스님은 개구리에게 사용했던 방법을 매미에게도 똑같이 사용하려고 하였다. 이에 스님은 매미들을 벙어리로 만들려고 부적을 만들어 하늘에 날리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매미들은 이미 개구리를 벙어리로 만든 사실을 알고 도망을 갔지만 눈치를 채지 못한 매미들은 스님의 도술에 걸려 모두 벙어리매미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날 울고 있는 매미는 눈치 빨리 도망간 매미이고 울지 못하는 매미는 좀 둔한 매미이다.
그런데 매미들 중에 스님의 도술을 피해 도망친 매미들이 서로 의논하게 되었다. 어디로 가서 살 것인가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산수와 풍경이 아름다운 강원도로 가기로 하고 강원도 중에서 설악산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고 그리고 매미들은 설악산이 원래 자신들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알고 반갑고 정다운 마음으로 설악산 계조암에 자리를 잡고 살기로 하였다.
그래서인지 계조암에는 여름이면 다른 곳보다 매미소리가 자연과 어울려 소리의 조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계조암에서 벙어리가 된 매미를 위하여, 그리고 그들을 대신하여 극렬하게 운다고 한다.
7. 영금정과 징바위
영금정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풍경은 절경이다. 영금정하면 정자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금정의 영자는 신령 영(靈), 거문고 금(琴), 정자 정(亭) 자를 쓴다. 신령스러운 거문고 소리가 나는 정자모양으로 생긴 석산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영금정은 큰 바위로 이루어진 절경의 산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바위를 부셔 방파제를 만들어 속초의 명소가 없어진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하늘나라의 선녀들이 하강하여 영금정에서 목욕을 하고 거문고를 연주하며 다시 돌아갔다고 하여 영금정 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영금정에는 장군이 말을 타고 다녔다는 너럭바위 위에 말발굽 모양이 있다. 영금정에 징바위가 있는데 바위를 치면 징소리가 난다고 하여 징바위라고 한다.
8. 수음바위
계조암 앞에 수음바위가 있다. 이 바위의 모양은 여자가 앉아서 일보는 모습이라 그렇게 불려진 이름이다. 그 바위 사이로 샘물이 흘러 나왔는데 그것을 먹으면 장사가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바위의 샘물을 먹은 사람들은 모두 힘이 센 장사가 되었다.
가뭄이 들어 샘에서 물이 잘 나오지 않으면 수음바위 건너편의 흔들바위를 수음바위 쪽으로 밀면 샘물이 나왔다고 한다. 옛날에는 흔들바위가 두 개여서 마치 남자의 낭심과 비슷했다고 한다.
조선조에 강원도 관찰사가 이곳을 순행하다가 수음바위의 물을 먹으면 장사가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 반역하는 자가 나오지 않을까 염려하여 바위 하나를 아래로 떨어뜨렸다고 한다. 그 후 바위 틈에서 샘물이 나오지 않고 설악산 근처에서 장사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 관찰사는 순행하면서 절에 개금불사가 있으면 솔가지 불로 그것을 검게 칠하는 등 불교를 억압하였다. 순행을 하며 울진 쪽으로 내려가다가 풍경 좋은 곳에서 시를 읊으면서 시를 지으려고 붓을 입에 물고 흥얼거리다가 칡줄기에 걸려 넘어지면서 붓대가 목을 찔러 죽었다고 한다.
8. 속초의 전설
여기 이젠 범바우 저 여기 영랑호 말이여. 거기 범바우있잖아. 범바우 여기 또 영금정 저 새슴 또 외웅치 그 외웅치가 들도 또 이제 청대 저 여기 청두산이 뭔가하면 화도가 꽃이 피면 뭐냐하면 이 그림 병풍처럼 이젠 저 청대라 하더라. 그래가지고 뭐해서 뭐하고 또 이제 올라가서 저기 육모정있잖아. 그 상도문 육모정 물치가 대략 내물치 거기 이젠 예전에 그러고 그리고 뭐 유해를 갔다고 요즘팔경은 요즘 지었지. 시에서 아마 요즘 지어서나오더만.
예전에 여긴 사람이 안살았어. 여긴 굴가여. 그러하고 이젠 제일 뭔가하면 여기 속초는 창설자가 아마 저 이후가 제일 많이 됐을거여. 이후가 동명동 동명동이 그 짝으로 일정 때도 그 짝으로 발전이 그 짝이 더 됐다고 동명동 지금 동명항구 있잖아. 항구있는 그쪽이 인제 어 항구가 되고 그래.
이제 학사평은 저 왜서 학사평이라 했냐하면 거기 올라가면 달매봉밑에 그 밑에 파명당이라는 데가 있어 평당이 파여 가서 말이여 이젠 파이니까 학이 날아가고 이제 노학동 거기 이젠 저 사진 뭐 어디저.
저쪽에 낙산사 어디 세 군데 뭐 학이 세 군데 떨어졌다 해서 여기저 노학동 그 전설이 파명당에서 뭐하고 그 신흥사은 뭔가 하면 내가 조금와서 들으니깐 이 신흥사가 지금 새 신(新)자로 고쳤잖아.
원치는 이 귀신 신(神)자라고 왜 귀신 신자냐 하면 그 내원암에 처음에 절이 있었데 절이 있었는데 3년 주기로 불이 자꾸 타 5~6년 마다 불이 타고 그러는데 한 그 어느 중대사가 있는데 이 달매봉신이 대사라는 이가 가재장삼을 입고서 꿈에 현몽을 했는데 여기다 절을 지으고 집을 지으면 3년 주기로 화재를 입을 수 있으니깐 요 아래 내려가 지금 신흥사 터여. 그 아래 내려가면 참나무 기둥에 그 저 극락전 대법전을 짓고 뭐하면 그 천년 만년 가도 화재를 입는 일이 없다고 그 이 6·25사변 통에도 끄떡없었어. 그저 대법전에 가서 그저 기둥이 이렇게 빙빙 꼬였는데 보면 그게 싸리기둥 싸리.
여기 저 대법전엔 신흥사 같은 게 없어. 나도 더러 절에 댕겨봤지만 이 신흥사 저 대법전에 가서 천천히 보면 그 참 용이 뒤틀려 넘어가고 그 배깥으로 저 이렇게 처마 끝으로 해서 넘겨보면 참 조각을 잘했네.
<김종태, 남. 83, 교동, 1999.11.25>
9. 속초지명유래
우리 속초를 흔히 묶을 속(束)자 풀 초(草)자라 그래서 속초다. 왜 그렇게 속초가 됐느냐 하는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요.
그래서 한가지 설은 영금정과 연관 돼서 속초가 됐다는 그러한 설이 있고, 하나는 딴 설이 있어요.
그러믄 영금정과 연관이 돼 가지고 속초라 하게 됐다 하는 설은, 그러니까 그 당시 석산이 있을 때 그 옆에 지금 현재 그 성황당이 말이죠. 에, 지금 저 정자 앉아 있는 자리, 서낭당 자리 옛날 서낭당 자리가 말이죠. 서낭당 자린데, 서낭당이 정자가 앉기 위하여 그 옆으로 옮겼습니다. 옮겼는데, 그 때 그쪽에 숲이 말이죠, 그때 소나무가 울창했어요. 울창한 소나무가 많이 있었답니다.
그러면 그쪽에 그 영금정 옆에 솔산이 있을 때 저 바다에서 이 포구를 이러 들여서 보면 그 솔산이 소나무하구 벽에다 풀을 묶아 세워논 것과 같은 그러한 형태로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인제 속초라고 이름 지었다 하는 사람도 있고, 한 일설(一說)은 이 속초지형이 와우형(臥牛形)으로 되어 있다.
소가 누워 있는 형태다. 그래 소가 누워 있는 데는 풀을 맘대로 활동해 뜯어먹지를 못합니다. 묶어 논 풀밖에 못 뜯어먹습니다.
그러면 속초는 와우형이니까 묶어 논 풀을 갖다 주지 않으면 그 소가 먹지를 못해 죽을 기 아니냐, 그래서 와우형의 지형을 따라서 그 속초를 항시 그 성행시키기,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그 소가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러니께 속초라는 명칭을 묶은 풀다불을 소한테 갖다 주어야 소가 먹고 살 끼 아니냐.
이래서 속초라는 그 지명을 지었다 하는 이런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아직까지 어느 설이 정설인지 이것까지도 아직 증명은 못했습니다만 그러한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장헌영, 남·54, 중앙동, 1981. 4. 27>
10. 속초지형과 영금정
속초를 왜 속초라 하느냐. 속초라 하는 것은 세 가지 설이 있어요. 첫째가 아. 속초는 산이 소가 누워있는 와우(臥牛)형국이고, 또 하나는 속새풀이 많이 났다 해서 속초라 한다. 그런 말도 있고, 또 하나는 울산바위에 이 풀을 가지고 울산바위를 묶었다 해서 속초라 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건 다 거짓말이고, 속초라는 것은 뭔고 하니까, 와우형인데 그 앞에 풀단이 놓여있다.
풀단이 속초거든. 묶여 있는 풀단. 그 풀을 소가 먹으면 힘을 내서 일어서서 활동할 수 있다. 그래이, 속초는 앞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그런 미래지향적인 이름이야.
속초가 어데가 풀단이고, 어데가 소냐 하면은, 저 영랑 등대, 그 등대 있는 곳이 소 머리에 해당한다. 그리고 갯배라는 게 있어요. 그게 소 앞발에 해당한다. 엑스포 들어오는데 청호동 있는 데가 소 뒷발이다. 저 대포 뒤에 산이 있죠? 대포 설악산 입구에서 쫌만 들어오면 동네가 있잖아. 거기가 대포동이지. 그 산이 속초 꼬리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것을 옛날에 할아버지들이 속초는 소가 누워있는 형국인데다가 그 앞에 풀단이 놓여있으니 속초라 한다 그 말이 옛날부터 전해왔거든. 근데 속새풀이 많다 함을 속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객지에서 들어온 사람이 저는 모르면서지. 마음대로 어데도 그런 이름이 있고 또 어데도 그런 이름이 있다고 지 마음 대로 써놨거든.
여기에 문화원장도 하고 나이가 팔십 가까운 신문기자도 한 그 똑똑한 양반이거든 이 고장 출신이거든. 이 영랑호 주변에서 살았거든. 그 양반얘기는, 자기가 어릴 때 속초가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이다.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그럼 그 말이 사실인데, 어떤 사람이 지리, 대한민국 지명 책을 쓴다해서 돌아 댕기며 조사를 했는데, 여기에 어떤 객지에서 온 사람이 속초는 속새풀이 많아서 속초라 한다. 이렇게 돼있거든. 허허. 그건 잘못됐는데.
이 속초란 이름에 대해서 10년 전, 20년 전에는 중앙신문기자나 방송국기자들이 나를 많이 찾아 왔어요. 그 때는 속초란 것을 왜 속초라 하느냐 하는 세 가지 설을 서로 주장하니까 어느 게 옳다는 것을 몰랐어요. 몰랬는데 문화원장 하던 양반이 그 고장에 오래 살고 그래서 그 양반이, 그건 와우형이 맞다. 그래서 속초가 와우형이다.
그런데 신문기자들 하고 방송기자들이 찾아와서 내가 이제 세 가지를 애기하거든, 그 양반들도 더러 물었어요, 그럼 당신은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 하고 물으니 모두가 다 와우형 그것을 택한다. 그래서 그 방송 초기에 속초가 한창 발전할 때 해마다 속초가 왜 속초냐? 전국적으로 방송을 했어요. 그때마다 내가 나가서 방송을 했어요. 생방송 말이야.
그런데 수 십 번 그 속초에 대한 방송을 했건만 그 속새풀이 있어서 속초라 한다는 것은 무미건조하다는 것이야.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듣기에 기분 좋게 들릴 게 하나도 없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요전에 “속초지명의 재조명”이라 하는 타이틀 밑에서 신문에 써냈어요.
나도 주장하기를 속초는 산 증인에 의해서 와우형이기 때문에 속초라 한다. 그 앞에 풀단이 놓여있는데 풀단이라는 게 뭐냐면 지금 등대 앞에 봉이 두 개 있었어요. 지금은 하나 있는데 규성이라고 해서 구불구불 용같이 있다고해서 그걸 규성이라고 하거든. 지금 거기엔 경비초소가 있어요. 방파제가 크게 나와있어요.
그 경비초소 있는데 그 속에 그런 솔이 있었어요. 내가 여기 온지 38년 한 40년 됐는데, 그런데 그걸로, 그 솔이 있는 곳을 비선대라고 했어요. 무슨 비 자냐. 비밀이란 비(秘) 자. 신선 선(仙)자. 왜 그런가 하면, 남 몰래 신선이 비밀히 와서 놀던 곳이다. 그만큼 경치가 좋은 곳이다 이 말인지.
동국여지승람에도 비선대가 나온다. 지금 저기 설악산 비선대(飛仙臺)는 그 때 나오지도 않았어. 요즘에야 와서 비선대란 말이 나왔지. 원래는 이게 진짜 비선대란 말이야. 글씨는 달라, 저건 날라간다는 날 비(飛) 자고, 요기는 비밀이라는 비(秘) 자야.
그런데 지금부터 외정 때 대정 14년 말로서 대정 15년에 출판해낸 『면세일반』 이라는 책이 있어요.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 일이야. 그러니까 74년 전이지. 내가 10살 때니까. 내가 84세 이니까, 요전에도 장교수란 양반이 와서 그걸 또 인쇄해갔어요.
그 책에 보면 뭐라고 써 있는고 하니까 그 부근이 소해금강, 적은 해금강, 왜 해금강이냐 하니까, 그때는 그 봉우리가 비선대란 봉우리가 있고, 송도란 게 있었어요. 그라고 그때는 그게 섬이래요. 지금은 육지예요. 38년 전에 여기 왔을 때는 그 물이 있어 가지고 못건너 갔어요. 난 낚시를 좋아하기 때문에, 낚시를 가자면 파도가 안 치는 날에 걷고 건너 갔어요. 그런데 차차차차 바다가 메워져 가지고 육지가 됐어요. 그런데 그것을 초소를 짓느라고 그 솔을 베어 버렸어요.
그걸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솔을 놨두고 초소를 지었을텐데 경치도 좋고 그랬는데, 이런 무식한 양반들이 저기 뭐야 간첩온다고, 해안초소 짓는다고 그걸 모두 베버렸어요. 그 다음 그 앞에 송도란 섬이 있는데, 자취도 없다 이거야. 왜 없느냐 이거야. 일본 사람이 여기 와 가지고 이제 속초항을 축항할 때야.
지금은 축항을 할려면 돌이 있어야 하는데 그 옆에 있는 돌을 마구 깨가지고, 축항에 쓴 모양인데, 그 신기하게 여기 등대 밑에 서낭당이 있어요.
그 서낭당부근에 어릴 때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노인이 한 분 있어요. 팔십 먹은 노인인데, 윤익현 이라고, 아이들 모아놓고 한문 선생도 했어요. 또 동사무소에 서기도 했고 아주 유식하지요. 그 양반이 애기하는데, 그 양반이 산에 댕기길 좋아하고 나도 산 좋아하고 그래 같이, 산에 댕기고 그랬는데, 영금정 부근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자기하고 김 모씨 라는 사람하고 그 두 사람밖에 없데요. 그 사람은 죽었어요.
이제 영금정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어요. 그기에 태어나고 거기서 자라나고 했으니까 다 알죠. 그 섬 그 부근에 사람들이 모여 야단이 났더래. 뭘 하는가 하고 가보니까 지금 활어장이라는 고기 양어장이 있어요. 물이 둘어갔다 나갔다 하는, 바위가 여기하나 있는데 이만치 만한 바위가 이쪽 바위위에 올라가 있더래.
하룻밤 사이에, 그래 인제 신기하다고, 신기하다고 사방팔방 모여가, 일본사람도 있었는데, 그때가 일본치하니까. 일본사람들이 우리보다 미신을 더 좋아 하거든. 그래 굿하고 이런 것을 말 할 것도 없이. 그래 일본 사람이 가만 생각해보니까 송도라는 섬과 그 앞에 있는 지금 바위가 이렇게 아주 큰 바위가 있는데 을매나 아름다운지 그렇게 송도라는 섬이 있고 비선대란 곳이 있고, 또 바위가 그런게 있고 하니까.
여기 영금정이란 데에 장구같은 바위가 있어요. 우리가 동굴 같은데 들어가면 종유석이란 것을 두드리면 땡 뗑 소리나잖아요. 그래 장구같이 생긴 바위를 두드리면 장구 소리가 난단 말이야. 그래서 생기기도 장구같이 생기고, 소리도 장구같이 나기 때문에 그걸 장구바위라 하잖아.
그 앞에 또 참 북같이 생긴 바위가 있는데 또 그걸 때리면 북소리가 나는데 또 그걸 북바위라고 해. 근데 영금정이란 것은 신령 영(靈) 자에 거문고 금(琴)자에 아주 신령스러운 음악이 깃들인 곳이야.
그 때는 을매나 기암절벽이 많은지 여기서 영금정 저쪽으로 넘어가는데, 못넘어 갔어. 험해가지고. 그래서 돌아 가지고, 자기들도 돌아댕겼다 그래. 그 내려가다 보면 그래 그 돌을 다 깨 가지고 지금은 다니기 쉽다. 근데 일본 왜정이 돌도 많고 그러니까, 그 돌도 깨내고 그 좋은 바위도 때내고, 그 부근에 있는 것을 다 깨내야 될 모양인데, 그걸 깨라니, 바위가 보통 바위가 아니다 이거지. 만약 깨내다가 잘못되면 어떡하냐 이거야. 그래서 굿을 시작했어.
신에게. 우리가 바위를 깨더라도 탈이 없게 해 달라고, 이 주일인가 했다 그래. 저 먼 곳에서 바위가 올라앉은 것을 구경하려고 왔다 그래. 그걸 네 굿을 한 뒤에 깨냈다. 그래서 지금은 경치가 나빠졌다.
그때 걸 놔둬서 그렇게 돼 있을 때 『면세일반』이라는 책에는 그렇게 아름다운,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와 놀고 시를 짓고, 이렇게 해서 소해금강. 금강산에도 있는 소해금강. 그리고 신흥사에 있는 부근에 소금강. 이게 강원도에 있는 소금강이제. 신흥사도 그 부근에 경치가 좋다해서 소금강이라 불렀대요. 그게 『면세일반』이라는 책에 써 있어요.
그런데 송도라는 섬도 없어지고 아무 것도 없어요. 지금은 영금정이라는 데로 다리를 놔서 정자를 지어서 놨어요. 옛날에는 초소 있던 데에 정자가 있었더래요. 지금은 흔적도 없고 내가 왔을 때 솔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이젠 속초라 하고, 또 한가지는 이 설악산 전체가 와우형이다 이거죠.
속초 부근만 그런 게 아니라 전체가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다. 지금 여기 대승폭포 있는 부근에서 대청봉으로 오르는 길이 있어요. 가다 중간에 귀떼기청봉이라는게 있어요. 그게 뭐냐면 소귀에 해당한다는 거요. 백담사 골짜기에도 귀떼기청봉이라는게 있어요. 그 골짜기를 우족동이라해요. 지금 젊은 사람들은 몰라요. 나이 많은 사람이나 알지.
여기 이박사라고 산을 좋아해서 병원도 문닫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87세예요. 그가 설악산 개척의 공로자로 설악산 없이 살 수 없는 분인데 그가 안다닌 데가 없어요.
소의 뒷발에 해당한다. 그런 점에서도 설악산 전체도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다. 이곳 속초도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다. 아주 모든 것이 일치한다. 이거죠. 그래서 누가 뭐라든간에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고 앞에 풀단이 놓여있다 해서 그 소가 풀을 먹고 일을 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지명이다 이거죠.
<박익훈, 남·84, 교동, 1999.12.1>
제3장 구비문학
1. 도문의 벼락바위
설악산에서 동해로 흐르는 강을 쌍천이라고 부른다. 도문고을 앞 쌍천에는 큰 바위가 있다. 그 바위는 중간이 갈라져 있고 우리의 삶을 지켜온 영험한 바위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으로, 이 바위를 벼락바위라고 부른다. 도문은 원래 부유한 고을로 설악산의 정기를 받았고 풍경이 아름답고 고요하여 문장을 즐기기에 적합하여 이름난 학자들도 많았다.
이 고을은 원래 설악의 영향으로 불교가 비교적 성한 곳이었다. 그럼으로 이 지역에는 불교와 관계된 담화가 많다. 도문 고을은 원래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풍수에도 최고의 장소이다. 이 고을의 산기슭에 牟거사라는 거사가 살았다. 이 거사는 출가는 하지 않았지만 불교의 도를 터득하고 살아가면서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그래서는 그는 자칭 모거사라고 하였다. 항상 승려와 같이 절제된 생활을 하였다. 채식을 하고 살생을 금하고 수도자의 길을 가면서 살았는데 그에게는 열대여섯 살 된 딸을 하나를 데리고 살았다.
그 거사는 매일 쌍천의 바위에서 낚시를 하며 소일을 하였다. 낚시에 고기가 잡히면 다시 물로 던져주고 이런 생활을 하며 지냈다. 그의 딸은 강에서 낚시하는 아버지 옆에서 시중을 들기도 하고 심심함을 풀어드렸다. 그런데 하루는 아버지가 낚시를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딸이 보니까 낚시를 고기가 물자 낚싯대가 움직였다. 그래서 아버지를 깨웠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 기색도 없이 다시 물에 놓아주었다.
이 때 낚시터에 한 승려가 나타났다. 이 승려는 파계승으로 이곳을 지나다가 모거사의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장난삼아 모거사를 만나 농을 시작하였다.
“소승 날이 저물어 하루 쉴 곳이 없으니 죄송스럽지만 거사님 댁에서 하루 묶었으면 합니다.”
정중하게 청했지만 거사는 들은 척도 안하고 계속 낚시만 열중하였다. 파계승은 서서히 오기가 생기고 화가 나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도를 터득한 거사라도 남의 말을 들어주지도 않는 못된 사람이구만 거만하기 짝이 없구나.”
생각을 하며 그 거사의 행동을 보니 말 한마디 없이 낚시에만 열중하고 자신에게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파계승은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거사 옆에서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다 거사를 무조건 따라갔다. 방으로 들어가기에 파계승도 따라 들어가 거사와 마주했지만 거사는 이유도 아무 말이 없었다. 왜 따라왔는지도, 어디에서 왔는지도, 어떻게 하라는 말 한마디 없었다.
그 때, 딸이 저녁상을 차려왔다. 저녁상을 보니 산나물에 감자를 넣고 죽을 만들어 죽 두 그릇을 가지고 들어왔다. 거사는 밥상이 들어오자 객에게는 신경도 안 쓰고 먹어보라는 말도 없이 혼자 두 그릇을 다 먹어버렸다. 파계승은 어쩔 수 없이 당하고는 괘씸한 생각에 화가 나기 시작하였다.
거사는 객에게는 관심도 없이 식곤증인지 피곤하지 벽에 기대여 눈을 감고 잠을 자기 시작하였다. 파계승은 분하고 무시하는 거사를 보며 복수를 하여 골려주고 싶었다. 이 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중이 거사를 깨웠다.
“거사님”, “거사님”
거사는 귀찮다는 듯이 눈을 겨우 뜨면서
“왜 그러는가”
“저는 아시다시피 이렇게 떠도는 중이지만 제가 여기에 온 것은 하나의 목적이 있어서요.”
“그래 무슨 목적에 왔는지 들어 봅시다.”
그랬더니 파계승이
“아주 귀한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자
“그 귀한 것이 무엇인가?”
“사실은 내가 귀한 부처님의 씨를 갖고 있습니다.”
거사는 파계승의 귀한 부처님 씨라는 말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부처님의 씨라...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의미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파계승은
“부처님의 씨를 갖고 있는데 저에게 밭을 하나 시주하시지요.”
모거사가 생각해 보니 참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나는 밭이라고 해 봤자 감자를 붙여 먹는 조그만 밭 한 뙤기가 전부인데 줄 밭이 없는데...”
“에이, 거사님, 훌륭한 밭이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는데...”
“무슨 소리 인고, 나에게 좋은 밭이 있더니... 나는 정말 좋은 밭이 없다네.”
“거사님, 아름다운 딸이 있지 않소.”
그때서야 거사는 파계승이 말하는 숨을 뜻을 이해하고 아주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당신은 파계하겠다는 말이오.”
“파계라니 당치 않은 소리요.”
그러자 파계승은 보따리를 슬금슬금 풀더니 상자하나를 거사 앞에 내어 놓으며
“이 상자 속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하오.”
정말 펼쳐보니 값진 보석이 가득하였다.
“이 보물들은 제가 부처의 씨를 그 밭에 심어서 얻은 종자로 하여금 절을 크게 짓고 그 절을 통하여 법연을 펼친 계획으로 쓸 재물이오. 그러니 딸을 저한테 주십시오.”
이자의 요구가 엉뚱하여 거사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시요. 당신에게 절대로 딸을 줄 수 없소.”
단호하게 거절하자
“그럼 좋습니다. 저하고 약속을 하나 하지요. 제가 여기서 밭을 얻지 못하면 이 많은 보화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저하고 약속을 하나 하시지요. 제가 이집을 중심으로 100장 이내에 이 금은보화의 상자를 숨겨 놓을 테니 제가 숨겨놓고 가서 100일후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거사님께서 도를 닦으신 분이니까 이 보화를 찾게 되면 저는 서사님의 도에 눌리고 진 사람으로 보화는 거사님 것이고, 만약에 거사님이 보화상자를 찾지 못하면 거사님 딸을 제에게 시주하십시오.”
거사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집을 중심으로 100장이라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거사는 중과 내기를 하면 무엇이든 이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거사는
“좋다.”하고. 자신 있게 약속을 하였다.
그날 밤 그 파계승은 보물상자를 어딘가에 숨겨놓고 사라져 버렸다.
그 다음날부터 그 거사는 파계승과의 약속을 딸에게 말하고 보물상자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 나섰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좋아하던 낚시도 그만두고 보화상자를 찾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거사는 보물상자를 탐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사랑스런 딸을 파계승에 빼앗긴다는 생각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 모습을 딸이 지켜보며 아버지의 모습에 마음이 무척 아팠다. 보화를 찾다가 99일이 지나갔다. 거사는 찾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한탄을 하며 자포자기 하였다.
그러면서 딸에게
“내가 너무 경솔했구나. 내가 도를 닦으며 평생을 살아왔는데 자신의 딸 하나도 구할 수 없다니 나의 도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너를 저 중놈에게 빼앗겨야 하다니, 미안하다.”
“내가 조그만 도를 배워 자만한 결과다. 내 도가 너무 보잘 것이 없구나.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설악산으로 들어가 도를 더 닦아야겠다.”
고 말하고는 설악산으로 입산하였다.
딸은 아버지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면서 말릴 수도 없고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딸은 그 자리에서 잡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를 시작하였다. 정성스럽게 몸과 마음을 하나로 모아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어두워지나 아버지를 위해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하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먹구름이 밀려오더니 천둥번개가 치고 동천개벽 하는 쾅소리가 아버지가 매일 낚시하던 바위에 벼락 치는 것이었다. 처녀가 그 바위에 가보니까, 벼락을 치자 그 큰 바위가 깜짝 놀라서 쩍하고 반으로 갈라졌다. 그런데 그 안에는 파계승이 숨겨놓았던 보상자가 나타났다.
그 바위를 사람들은 벼락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복은 딸의 효심에 감복하여 하늘이 내려준 고귀한 보답이라고 칭송하였다. 지금도 그 바위는 이러한 담화를 간직한 채 설악산을 굽어보며 동해로 흐르는 물을 장엄하게 지켜보고 있다.
2. 울산바위 전설
울산바위는 설악산을 대표하는 바위로 그 웅장함은 대단하다. 그런데 왜 설악바위라 하지 않고 울산바위라고 하냐면 그 유래는 이렇다.
조물주가 천하제일의 명산을 금강산에 만들기로 하고 전국에 있는 웅장하고 풍유스러운 산봉우리를 뽑아서 1만 2천봉의 천하 명산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래서 전국에 있는 바위들에게 금강산으로 모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울산에 있는 바위는 항상 자신의 모습에 자만하고 있었다. 자신의 모습이 장엄하고 웅장하여 세상에서 최고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조물주의 이야기를 듣고 금강산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울산의 바위가 떠나면서 주위의 바위들에게
“나는 본시 장엄한 바위로 이곳에 있을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명성이나 빛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멋진 바위들과 웅장함을 겨를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금강산으로 떠난다.”
이렇게 호언장담을 하고 울산을 떠났다. 이 바위는 너무 큰 바위라 빨리 달릴 수도 빨리 걸을 수도 없었다. 다른 바위들은 달려가지만 울산의 바위는 그럴 수 없었다. 말이 바위지 이 바위는 바위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산이었다. 이 거대한 바위는 걷는 것에 지쳐가고 있었다. 울산의 바위는 산맥을 따라 걸으면서 후회하기도 하였다.
너무 힘들고 어려운 여정이었다. 온 힘을 다해 금강산으로 길을 재촉하였지만 힘이 들어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되어 기진맥진하였다. 울산의 바위가 기를 쓰고 온 곳이 바로 설악산이었다. 빨리 가서 좋은 자리를 잡고 자신의 모습을 뽐내고 싶었다. 긴 여정으로 울산의 바위는 더 이상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바위는 조금 쉬어가기로 했다. 이왕 쉴려면 풍광 좋은 곳에서 쉬기로 하였다. 그곳은 웅장한 설악산과 아름다운 바다가 보이는 풍유스러운 곳이었다. 지금의 울산바위 자리에서 쉬게 되었다.
편안하게 쉬고 있는데 조물주가 1만 2천봉을 다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1만 2천봉이 들지 못한 바위들은 모두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울산의 바위 실망이 말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형상에 자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조물주가 자신을 보면 높이 평가하여 중요한 자리를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물주를 찾아갔다.
조물주에게 예를 갖추고 나서
“조물주님 저는 웅장하여 빨리 걸을 수 없어 다소 늦었습니다. 저를 보시고 금강산에 좋은 자리를 내어주십시오.”
조물주는 울산의 바위를 살펴보더니
“형상은 금강산을 빛내고도 남음이 있으나 이미 금강산을 모두 이룬 후라 나도 어쩔 수 없게 되었구나.”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그러자 조물주는
“설악산은 너의 형상이 너무 커서 자리 할 곳이 없다 그러나 다른 좋은 산으로 가서 멋스러움을 자랑 하거라”
하였다.
이 소리를 듣고 울산의 바위는 화도 나고 자존심이 상하여
“저도 자존심이 있소.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가겠소.”
하지만 울산의 바위는 고향의 바위들에게 허풍도 떨어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에 금강산에 물러 나오며 설악산을 생각하게 되었다. 웅장한 산과 아름다운 동해 바다를 굽어 볼 수 있는 설악산에서 자신의 형상을 뽐내고 싶었다.
그래서 울산바위는 설악산으로 돌아와 울산으로 돌아가지 않고 설악산에서 그 장엄함을 뽐내고 있다.
3. 울산바위와 동자승
설악산의 울산바위는 그 장엄함을 뽐내고 있다. 그래서 많은 풍류객들이 이곳을 많이 찾았다. 그런데 울산의 원님이 풍유차 설악산에 왔다가 울산바위의 유래를 듣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울산바위를 둘러보니 정말 장엄하고 멋스러웠다. 이에 울산 원님은 마음이 아팠다. 울산에 이런 웅장한 바위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찾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그 모습이 이곳에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이에 배가 아팠다. 그래서 설악산에 대한 시기심도 있고 해서 스님들을 골려주고 싶었다.
다음날 원님은 많은 생각을 한 후에 설악산 중들을 괴롭힐 생각에 신흥사로 찾아가 주지승을 찾았다. 조선조는 배불숭유정책으로 불교가 유교보다 비교적 천시 받던 시기였다. 주지승은 원님의 행차에 예를 갖추었다. 원님 다짜고짜
“나는 울산의 원님인데 왜 울산의 장엄한 바위를 설악산에다 갔다 놓아 풍경이 더욱 아름답고 이로 인해 설악산과 사찰을 찾는 사람도 많은데 세금 한 푼 내지 않는냐! 못된 놈들이구먼.”
그때는 스님들이 힘이 없을 때라 꼼짝 없이 당하고 있었다.
원님은 다시
“내 너희들이 몇 해가 지나도 세금을 내지 않아 내가 오늘은 직접 세를 받으러 왔으니 당장 준비하도록 하여라.”
호통을 쳤다.
스님들은 당시 사회가 불교를 배척하는 시기라 원님에게 기도 펴지 못하고 아무 변명이나 말도 못하고 세를 바치기로 하였다. 그 다음해부터 울산에서 세를 받아가기 시작했다. 절의 살림살이는 세금으로 어려워졌고 농사를 지어도 다 뜯어가니까 주지는 걱정이 말이 아니었다.
“울산에서 또 세를 받으러 올 텐데...”
하고 땅이 꺼져라 근심을 하니까 이것을 다 지켜본 동자승이
“스님, 무엇 때문에 요즈음 그렇게 근심걱정을 많이 하십니까?”
“너는 몰라도 된다. 너가 알면 걱정만 될 것이다. 그러니 알려고 하지 마라.”
“스님, 그러시지 말고 제게 말을 해 주십시오. 혹 제가 문제를 해결할 지 누가 알겠습니까?”
동자승이 자꾸 애원을 하니까 주지스님이 동자승이 생각했던 대로 울산바위의 세금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
“스님, 뭐 그런 것을 가지고 걱정하십니까? 그 문제를 저에게 맡기시면 제가 다 해결하겠습니다. 이번에 울산에서 세를 받으러 오면 저에게 이야기 해주시면 제가 다 해결하겠습니다.”
주지승은 기특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세를 받으러 오는 날 주지승과 스님들은 절을 피하고 동자승만 남겨 놓았다.
고을 원님이 보낸 사람들이 세를 받으러 절로 들이 닥쳤다. 주지승을 찾자 동자승은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맞이하였다.
“울산 원님이 시켜 울산바위 세를 받으러 왔으니 빨리 주지승을 불러 오너라.”
“바위 세를 받으러 오셨다구요.”
“우리는 바위 세를 낼 수 없습니다.”
“뭐야 당장 주지를 불러 오지 않으면 혼을 내야겠다.”
“말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 사찰에서는 그 동안 억울하게 세를 냈습니다. 지금까지는 어쩔 수 없고 올해부터는 세를 낼 수 없다고 원님께 전해주십시오.”
어린 동자승은 지혜롭게 이야기를 풀어 갔다. 그러자 원님의 사자들은
“설악산에서 울산바위가 풍광을 아름답게 하였으니 당연히 세금을 내야지 무슨 말인가?”
“사실, 저 바위가 있어 우리 사찰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지금 자 바위로 인해 많은 손해를 보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거대한 바위가 사찰에 자리하고 있어 풀 한 포기 나무 한그루 자라지도 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올해부터는 그 바위를 가지고 가지 않으시면 저희가 세를 받아야 겠습니다. 울산바위를 가지고 가시든지, 세금을 내시든지 하십시오.”
원님의 사자들은 큰일이 났다. 세금은 고사하고 도리어 세를 주어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 날 다시 와서 이야기 하자며 돌아갔다. 다음날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너 말대로 울산바위를 가지고 갈 테니 옮겨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해 주어야겠다. 네가 만약 가져가도록 준비를 하지 못한다면 울산바위를 우리에게 넘길 의사가 없다고 생각하고 세금을 그대로 받아야겠다. 어떻게 하겠느냐?”
동자승이 그들이 그렇게 나올 것을 알고 당당하게 망설임없이 이야기하였다.
“요구대로 하겠습니다.”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너희들이 울산으로 가지고 갈 수 있도록 재로 새끼를 꼬아서 울산바위를 묶어 놓아라. 그러면 우리가 갖고 가겠다.”
동자승은
“그렇게 하겠습니다. 재로 새끼를 꼬는데 시간이 필요하니 체류하는 곳을 일러 주시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이에 울산에서 온 원님의 사자들은 숙소로 돌아가면서 아무리 도를 터득한 자라도 재로 새끼를 꼴 수 없다면 비아냥거렸다.
주지승이 절로 돌아와 몹시 궁금하여 동자승에게 물어 보았다. 주지는 동자승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 지혜는 뛰어나지만 어떻게 재로 새끼를 만들어 울산바위를 맬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동자승은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동자승은 스님들과 고을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새끼를 꼬기 시작하였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새끼를 꼬아서 동자승이 시키는 대로 울산바위로 옮기게 되었다. 동자승이 시키는 대로 울산바위를 새끼로 묶고 그 새끼에 불을 붙이니 울산바위는 재로 꼬아 만들 새끼로 묶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울산에서 온 자들에게 연락하였다. 울산바위에 와 보니 재로 만든 새끼로 울산바위가 묶어져 있었다.
동자승이 그들을 보고
“이제 재로 꼬은 새끼로 울산바위를 묶어 놨으니 가지고 가시지요.”
이것을 보고 그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뒷걸음쳐 산을 내려가 울산으로 도망하였다.
동자승의 지혜로 울산에서 사찰로 세금을 받으러 오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울산바위에 가면 바위를 묶었던 흔적이 있다고 한다.
4. 파명당과 학사평
우리 민족은 예부터 명당자리를 중시하였다. 명당자리와 관계된 이야기가 노학동에 전해오고 있다. 이곳에 이름난 유명한 가문이 있었는데 이 가문은 대대로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하는 인사도 많았고 이름난 학자도 많은 명문거족이었다.
그런데 이 집안이 언제부턴가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도 없고 집안에 사람이 죽고 불길한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가문 사람들이 모여 집안의 일을 의논하면서 집안이 잘 안 되는 것은 묘 자리 때문이라고 하였다. 당시만 해도 풍수설을 상당히 믿고 있었다. 그래서 집안이 잘 안되면 묘자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집안사람들이 지관을 모시고 집안의 조상의 묘를 다시 정하기로 하였다. 지관을 모시고 조상의 묘를 보니까 음지여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그런데 묘를 옮기려고 파니까 봉분을 다 파고 관이 드러나자 학 두 마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학 두 마리가 날아올라서 한 마리는 북쪽을 향해 날아가고, 한 마리는 남쪽을 향해 날아갔는데 북쪽으로 향해 날아가 학사평(鶴沙坪) 고을에 앉았다. 그때 학사평은 모래밭이었다. 그래서 학사평이라고 하였다.
남쪽으로 날아간 학은 손양면 학포리(鶴浦里)로 날아갔다. 학포리로 날아가 그곳에 앉았다고 하여 학포리가 되었다.
이러한 파명당 이야기는 많은 지역에 전해오고 있다.
5. 권금성의 유래
설악산의 절경 중에 권금성은 일품이다. 이러한 권금성은 재미있는 전설을 갖고 있다.
아주 오랜 옛날 한 마을에 권씨 성의 장사와 김씨 성의 장사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이 쳐들어오자 산세가 험한 곳으로 피난하였다. 그곳의 지금의 권금성 자리이다. 적이 오자 방어할 길이 없어 서로 의논하였다. 그래서 두 장사가 그곳에 성을 쌓기로 하였다.
“적병이 오기 전에 성을 쌓아야 할 텐데...”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안에 성을 만들어야 화를 면할 것이오.”
하지만 성을 쌓는 다는 것이 결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의논 끝에 돌을 날라다가 이곳이 쌓기로 하였다. 하지만 먼 거리에서 돌을 날라다가 성을 쌓는 다면 몇 달이 걸릴 것 같았다.
두 장사가 궁리 끝에
“이렇게 합시다. 돌을 날라서는 성을 쌓을 수 없으니 내가 강에 내려가 돌을 던질 테니 당신은 여기서 받아서 성을 쌓으시오, 그래야만 하루 밤에 성을 다 쌓을 수 있을 것이요.”
“좋습니다.”
그래서 권장사가 강으로 내려가 돌을 주어서 던졌다. 그러면 김장사는 그 위에서 돌을 받아가지고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힘들면 서로 교대로 김장사가 강으로 내려가 돌을 던지고 권장사는 위에서 돌을 받아 성을 쌓았다.
이렇게 권장사와 김장사가 만든 성이라 權金城 이라고 부른다.
6. 계조암의 매미
계조암은 예부터 스님들이 도를 터득하기에 좋은 도량으로 많은 수도자들이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계조암 부근에는 매미가 많기로 유명하다. 특히, 계조암에서 듣는 매미들의 소리는 계곡에 울려 자연의 신비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계조암과 매미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옛날, 스님이 도를 닦기 위해 계조암에서 수도를 시작하였다. 스님의 일은 하루 종일 도만 닦고 그 외에는 잠자는 것이 전부였다. 스님은 도를 닦다가도 한 낮에 낮잠을 실컷 자고 일어났다. 그래서인지 밤에는 깊은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여름만 되면 한 밤에 불면증으로 고생을 하였다. 그 이유는 숲과 냇가에서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에 잠 못 들고 심한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스님은 아직 도를 터득하지 못해서인지 개구리 소리에 초연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개구리를 모두 찾아다니며 쫓을 수도 없고, 다 잡을 수도 없고 어쩔 수 없는 형편에 고민하게 되었다. 결국은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도를 터득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 도를 터득하지 못하여 여러 방법과 노력을 해 보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많은 방법과 연구와 비책을 통해서 마침내 개구리 울음을 그치게 하는 도술을 터득하였다.
그 여름부터 개구리가 울어대기 시작하자 부적을 만들어 던지자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멈추게 하였다. 그때부터 스님은 편안하게 밤잠을 푹 잘 수 있었다. 자신의 노력과 궁리를 통해 자신을 괴롭히던 자연물을 없애고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또 하나 있었다. 밤잠을 설치게 하던 개구리의 울음소리는 해결했지만 낮잠을 방해하는 매미소리는 또 하나의 방해물이었다. 스님은 개구리에게 사용했던 방법을 매미에게도 똑같이 사용하려고 하였다. 이에 스님은 매미들을 벙어리로 만들려고 부적을 만들어 하늘에 날리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매미들은 이미 개구리를 벙어리로 만든 사실을 알고 도망을 갔지만 눈치를 채지 못한 매미들은 스님의 도술에 걸려 모두 벙어리매미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날 울고 있는 매미는 눈치 빨리 도망간 매미이고 울지 못하는 매미는 좀 둔한 매미이다.
그런데 매미들 중에 스님의 도술을 피해 도망친 매미들이 서로 의논하게 되었다. 어디로 가서 살 것인가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산수와 풍경이 아름다운 강원도로 가기로 하고 강원도 중에서 설악산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고 그리고 매미들은 설악산이 원래 자신들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알고 반갑고 정다운 마음으로 설악산 계조암에 자리를 잡고 살기로 하였다.
그래서인지 계조암에는 여름이면 다른 곳보다 매미소리가 자연과 어울려 소리의 조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계조암에서 벙어리가 된 매미를 위하여, 그리고 그들을 대신하여 극렬하게 운다고 한다.
7. 영금정과 징바위
영금정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풍경은 절경이다. 영금정하면 정자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금정의 영자는 신령 영(靈), 거문고 금(琴), 정자 정(亭) 자를 쓴다. 신령스러운 거문고 소리가 나는 정자모양으로 생긴 석산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영금정은 큰 바위로 이루어진 절경의 산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바위를 부셔 방파제를 만들어 속초의 명소가 없어진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하늘나라의 선녀들이 하강하여 영금정에서 목욕을 하고 거문고를 연주하며 다시 돌아갔다고 하여 영금정 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영금정에는 장군이 말을 타고 다녔다는 너럭바위 위에 말발굽 모양이 있다. 영금정에 징바위가 있는데 바위를 치면 징소리가 난다고 하여 징바위라고 한다.
8. 수음바위
계조암 앞에 수음바위가 있다. 이 바위의 모양은 여자가 앉아서 일보는 모습이라 그렇게 불려진 이름이다. 그 바위 사이로 샘물이 흘러 나왔는데 그것을 먹으면 장사가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바위의 샘물을 먹은 사람들은 모두 힘이 센 장사가 되었다.
가뭄이 들어 샘에서 물이 잘 나오지 않으면 수음바위 건너편의 흔들바위를 수음바위 쪽으로 밀면 샘물이 나왔다고 한다. 옛날에는 흔들바위가 두 개여서 마치 남자의 낭심과 비슷했다고 한다.
조선조에 강원도 관찰사가 이곳을 순행하다가 수음바위의 물을 먹으면 장사가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 반역하는 자가 나오지 않을까 염려하여 바위 하나를 아래로 떨어뜨렸다고 한다. 그 후 바위 틈에서 샘물이 나오지 않고 설악산 근처에서 장사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 관찰사는 순행하면서 절에 개금불사가 있으면 솔가지 불로 그것을 검게 칠하는 등 불교를 억압하였다. 순행을 하며 울진 쪽으로 내려가다가 풍경 좋은 곳에서 시를 읊으면서 시를 지으려고 붓을 입에 물고 흥얼거리다가 칡줄기에 걸려 넘어지면서 붓대가 목을 찔러 죽었다고 한다.
8. 속초의 전설
여기 이젠 범바우 저 여기 영랑호 말이여. 거기 범바우있잖아. 범바우 여기 또 영금정 저 새슴 또 외웅치 그 외웅치가 들도 또 이제 청대 저 여기 청두산이 뭔가하면 화도가 꽃이 피면 뭐냐하면 이 그림 병풍처럼 이젠 저 청대라 하더라. 그래가지고 뭐해서 뭐하고 또 이제 올라가서 저기 육모정있잖아. 그 상도문 육모정 물치가 대략 내물치 거기 이젠 예전에 그러고 그리고 뭐 유해를 갔다고 요즘팔경은 요즘 지었지. 시에서 아마 요즘 지어서나오더만.
예전에 여긴 사람이 안살았어. 여긴 굴가여. 그러하고 이젠 제일 뭔가하면 여기 속초는 창설자가 아마 저 이후가 제일 많이 됐을거여. 이후가 동명동 동명동이 그 짝으로 일정 때도 그 짝으로 발전이 그 짝이 더 됐다고 동명동 지금 동명항구 있잖아. 항구있는 그쪽이 인제 어 항구가 되고 그래.
이제 학사평은 저 왜서 학사평이라 했냐하면 거기 올라가면 달매봉밑에 그 밑에 파명당이라는 데가 있어 평당이 파여 가서 말이여 이젠 파이니까 학이 날아가고 이제 노학동 거기 이젠 저 사진 뭐 어디저.
저쪽에 낙산사 어디 세 군데 뭐 학이 세 군데 떨어졌다 해서 여기저 노학동 그 전설이 파명당에서 뭐하고 그 신흥사은 뭔가 하면 내가 조금와서 들으니깐 이 신흥사가 지금 새 신(新)자로 고쳤잖아.
원치는 이 귀신 신(神)자라고 왜 귀신 신자냐 하면 그 내원암에 처음에 절이 있었데 절이 있었는데 3년 주기로 불이 자꾸 타 5~6년 마다 불이 타고 그러는데 한 그 어느 중대사가 있는데 이 달매봉신이 대사라는 이가 가재장삼을 입고서 꿈에 현몽을 했는데 여기다 절을 지으고 집을 지으면 3년 주기로 화재를 입을 수 있으니깐 요 아래 내려가 지금 신흥사 터여. 그 아래 내려가면 참나무 기둥에 그 저 극락전 대법전을 짓고 뭐하면 그 천년 만년 가도 화재를 입는 일이 없다고 그 이 6·25사변 통에도 끄떡없었어. 그저 대법전에 가서 그저 기둥이 이렇게 빙빙 꼬였는데 보면 그게 싸리기둥 싸리.
여기 저 대법전엔 신흥사 같은 게 없어. 나도 더러 절에 댕겨봤지만 이 신흥사 저 대법전에 가서 천천히 보면 그 참 용이 뒤틀려 넘어가고 그 배깥으로 저 이렇게 처마 끝으로 해서 넘겨보면 참 조각을 잘했네.
<김종태, 남. 83, 교동, 1999.11.25>
9. 속초지명유래
우리 속초를 흔히 묶을 속(束)자 풀 초(草)자라 그래서 속초다. 왜 그렇게 속초가 됐느냐 하는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요.
그래서 한가지 설은 영금정과 연관 돼서 속초가 됐다는 그러한 설이 있고, 하나는 딴 설이 있어요.
그러믄 영금정과 연관이 돼 가지고 속초라 하게 됐다 하는 설은, 그러니까 그 당시 석산이 있을 때 그 옆에 지금 현재 그 성황당이 말이죠. 에, 지금 저 정자 앉아 있는 자리, 서낭당 자리 옛날 서낭당 자리가 말이죠. 서낭당 자린데, 서낭당이 정자가 앉기 위하여 그 옆으로 옮겼습니다. 옮겼는데, 그 때 그쪽에 숲이 말이죠, 그때 소나무가 울창했어요. 울창한 소나무가 많이 있었답니다.
그러면 그쪽에 그 영금정 옆에 솔산이 있을 때 저 바다에서 이 포구를 이러 들여서 보면 그 솔산이 소나무하구 벽에다 풀을 묶아 세워논 것과 같은 그러한 형태로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인제 속초라고 이름 지었다 하는 사람도 있고, 한 일설(一說)은 이 속초지형이 와우형(臥牛形)으로 되어 있다.
소가 누워 있는 형태다. 그래 소가 누워 있는 데는 풀을 맘대로 활동해 뜯어먹지를 못합니다. 묶어 논 풀밖에 못 뜯어먹습니다.
그러면 속초는 와우형이니까 묶어 논 풀을 갖다 주지 않으면 그 소가 먹지를 못해 죽을 기 아니냐, 그래서 와우형의 지형을 따라서 그 속초를 항시 그 성행시키기,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그 소가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러니께 속초라는 명칭을 묶은 풀다불을 소한테 갖다 주어야 소가 먹고 살 끼 아니냐.
이래서 속초라는 그 지명을 지었다 하는 이런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아직까지 어느 설이 정설인지 이것까지도 아직 증명은 못했습니다만 그러한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장헌영, 남·54, 중앙동, 1981. 4. 27>
10. 속초지형과 영금정
속초를 왜 속초라 하느냐. 속초라 하는 것은 세 가지 설이 있어요. 첫째가 아. 속초는 산이 소가 누워있는 와우(臥牛)형국이고, 또 하나는 속새풀이 많이 났다 해서 속초라 한다. 그런 말도 있고, 또 하나는 울산바위에 이 풀을 가지고 울산바위를 묶었다 해서 속초라 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건 다 거짓말이고, 속초라는 것은 뭔고 하니까, 와우형인데 그 앞에 풀단이 놓여있다.
풀단이 속초거든. 묶여 있는 풀단. 그 풀을 소가 먹으면 힘을 내서 일어서서 활동할 수 있다. 그래이, 속초는 앞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그런 미래지향적인 이름이야.
속초가 어데가 풀단이고, 어데가 소냐 하면은, 저 영랑 등대, 그 등대 있는 곳이 소 머리에 해당한다. 그리고 갯배라는 게 있어요. 그게 소 앞발에 해당한다. 엑스포 들어오는데 청호동 있는 데가 소 뒷발이다. 저 대포 뒤에 산이 있죠? 대포 설악산 입구에서 쫌만 들어오면 동네가 있잖아. 거기가 대포동이지. 그 산이 속초 꼬리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것을 옛날에 할아버지들이 속초는 소가 누워있는 형국인데다가 그 앞에 풀단이 놓여있으니 속초라 한다 그 말이 옛날부터 전해왔거든. 근데 속새풀이 많다 함을 속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객지에서 들어온 사람이 저는 모르면서지. 마음대로 어데도 그런 이름이 있고 또 어데도 그런 이름이 있다고 지 마음 대로 써놨거든.
여기에 문화원장도 하고 나이가 팔십 가까운 신문기자도 한 그 똑똑한 양반이거든 이 고장 출신이거든. 이 영랑호 주변에서 살았거든. 그 양반얘기는, 자기가 어릴 때 속초가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이다.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그럼 그 말이 사실인데, 어떤 사람이 지리, 대한민국 지명 책을 쓴다해서 돌아 댕기며 조사를 했는데, 여기에 어떤 객지에서 온 사람이 속초는 속새풀이 많아서 속초라 한다. 이렇게 돼있거든. 허허. 그건 잘못됐는데.
이 속초란 이름에 대해서 10년 전, 20년 전에는 중앙신문기자나 방송국기자들이 나를 많이 찾아 왔어요. 그 때는 속초란 것을 왜 속초라 하느냐 하는 세 가지 설을 서로 주장하니까 어느 게 옳다는 것을 몰랐어요. 몰랬는데 문화원장 하던 양반이 그 고장에 오래 살고 그래서 그 양반이, 그건 와우형이 맞다. 그래서 속초가 와우형이다.
그런데 신문기자들 하고 방송기자들이 찾아와서 내가 이제 세 가지를 애기하거든, 그 양반들도 더러 물었어요, 그럼 당신은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 하고 물으니 모두가 다 와우형 그것을 택한다. 그래서 그 방송 초기에 속초가 한창 발전할 때 해마다 속초가 왜 속초냐? 전국적으로 방송을 했어요. 그때마다 내가 나가서 방송을 했어요. 생방송 말이야.
그런데 수 십 번 그 속초에 대한 방송을 했건만 그 속새풀이 있어서 속초라 한다는 것은 무미건조하다는 것이야.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듣기에 기분 좋게 들릴 게 하나도 없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요전에 “속초지명의 재조명”이라 하는 타이틀 밑에서 신문에 써냈어요.
나도 주장하기를 속초는 산 증인에 의해서 와우형이기 때문에 속초라 한다. 그 앞에 풀단이 놓여있는데 풀단이라는 게 뭐냐면 지금 등대 앞에 봉이 두 개 있었어요. 지금은 하나 있는데 규성이라고 해서 구불구불 용같이 있다고해서 그걸 규성이라고 하거든. 지금 거기엔 경비초소가 있어요. 방파제가 크게 나와있어요.
그 경비초소 있는데 그 속에 그런 솔이 있었어요. 내가 여기 온지 38년 한 40년 됐는데, 그런데 그걸로, 그 솔이 있는 곳을 비선대라고 했어요. 무슨 비 자냐. 비밀이란 비(秘) 자. 신선 선(仙)자. 왜 그런가 하면, 남 몰래 신선이 비밀히 와서 놀던 곳이다. 그만큼 경치가 좋은 곳이다 이 말인지.
동국여지승람에도 비선대가 나온다. 지금 저기 설악산 비선대(飛仙臺)는 그 때 나오지도 않았어. 요즘에야 와서 비선대란 말이 나왔지. 원래는 이게 진짜 비선대란 말이야. 글씨는 달라, 저건 날라간다는 날 비(飛) 자고, 요기는 비밀이라는 비(秘) 자야.
그런데 지금부터 외정 때 대정 14년 말로서 대정 15년에 출판해낸 『면세일반』 이라는 책이 있어요.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 일이야. 그러니까 74년 전이지. 내가 10살 때니까. 내가 84세 이니까, 요전에도 장교수란 양반이 와서 그걸 또 인쇄해갔어요.
그 책에 보면 뭐라고 써 있는고 하니까 그 부근이 소해금강, 적은 해금강, 왜 해금강이냐 하니까, 그때는 그 봉우리가 비선대란 봉우리가 있고, 송도란 게 있었어요. 그라고 그때는 그게 섬이래요. 지금은 육지예요. 38년 전에 여기 왔을 때는 그 물이 있어 가지고 못건너 갔어요. 난 낚시를 좋아하기 때문에, 낚시를 가자면 파도가 안 치는 날에 걷고 건너 갔어요. 그런데 차차차차 바다가 메워져 가지고 육지가 됐어요. 그런데 그것을 초소를 짓느라고 그 솔을 베어 버렸어요.
그걸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솔을 놨두고 초소를 지었을텐데 경치도 좋고 그랬는데, 이런 무식한 양반들이 저기 뭐야 간첩온다고, 해안초소 짓는다고 그걸 모두 베버렸어요. 그 다음 그 앞에 송도란 섬이 있는데, 자취도 없다 이거야. 왜 없느냐 이거야. 일본 사람이 여기 와 가지고 이제 속초항을 축항할 때야.
지금은 축항을 할려면 돌이 있어야 하는데 그 옆에 있는 돌을 마구 깨가지고, 축항에 쓴 모양인데, 그 신기하게 여기 등대 밑에 서낭당이 있어요.
그 서낭당부근에 어릴 때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노인이 한 분 있어요. 팔십 먹은 노인인데, 윤익현 이라고, 아이들 모아놓고 한문 선생도 했어요. 또 동사무소에 서기도 했고 아주 유식하지요. 그 양반이 애기하는데, 그 양반이 산에 댕기길 좋아하고 나도 산 좋아하고 그래 같이, 산에 댕기고 그랬는데, 영금정 부근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자기하고 김 모씨 라는 사람하고 그 두 사람밖에 없데요. 그 사람은 죽었어요.
이제 영금정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어요. 그기에 태어나고 거기서 자라나고 했으니까 다 알죠. 그 섬 그 부근에 사람들이 모여 야단이 났더래. 뭘 하는가 하고 가보니까 지금 활어장이라는 고기 양어장이 있어요. 물이 둘어갔다 나갔다 하는, 바위가 여기하나 있는데 이만치 만한 바위가 이쪽 바위위에 올라가 있더래.
하룻밤 사이에, 그래 인제 신기하다고, 신기하다고 사방팔방 모여가, 일본사람도 있었는데, 그때가 일본치하니까. 일본사람들이 우리보다 미신을 더 좋아 하거든. 그래 굿하고 이런 것을 말 할 것도 없이. 그래 일본 사람이 가만 생각해보니까 송도라는 섬과 그 앞에 있는 지금 바위가 이렇게 아주 큰 바위가 있는데 을매나 아름다운지 그렇게 송도라는 섬이 있고 비선대란 곳이 있고, 또 바위가 그런게 있고 하니까.
여기 영금정이란 데에 장구같은 바위가 있어요. 우리가 동굴 같은데 들어가면 종유석이란 것을 두드리면 땡 뗑 소리나잖아요. 그래 장구같이 생긴 바위를 두드리면 장구 소리가 난단 말이야. 그래서 생기기도 장구같이 생기고, 소리도 장구같이 나기 때문에 그걸 장구바위라 하잖아.
그 앞에 또 참 북같이 생긴 바위가 있는데 또 그걸 때리면 북소리가 나는데 또 그걸 북바위라고 해. 근데 영금정이란 것은 신령 영(靈) 자에 거문고 금(琴)자에 아주 신령스러운 음악이 깃들인 곳이야.
그 때는 을매나 기암절벽이 많은지 여기서 영금정 저쪽으로 넘어가는데, 못넘어 갔어. 험해가지고. 그래서 돌아 가지고, 자기들도 돌아댕겼다 그래. 그 내려가다 보면 그래 그 돌을 다 깨 가지고 지금은 다니기 쉽다. 근데 일본 왜정이 돌도 많고 그러니까, 그 돌도 깨내고 그 좋은 바위도 때내고, 그 부근에 있는 것을 다 깨내야 될 모양인데, 그걸 깨라니, 바위가 보통 바위가 아니다 이거지. 만약 깨내다가 잘못되면 어떡하냐 이거야. 그래서 굿을 시작했어.
신에게. 우리가 바위를 깨더라도 탈이 없게 해 달라고, 이 주일인가 했다 그래. 저 먼 곳에서 바위가 올라앉은 것을 구경하려고 왔다 그래. 그걸 네 굿을 한 뒤에 깨냈다. 그래서 지금은 경치가 나빠졌다.
그때 걸 놔둬서 그렇게 돼 있을 때 『면세일반』이라는 책에는 그렇게 아름다운,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와 놀고 시를 짓고, 이렇게 해서 소해금강. 금강산에도 있는 소해금강. 그리고 신흥사에 있는 부근에 소금강. 이게 강원도에 있는 소금강이제. 신흥사도 그 부근에 경치가 좋다해서 소금강이라 불렀대요. 그게 『면세일반』이라는 책에 써 있어요.
그런데 송도라는 섬도 없어지고 아무 것도 없어요. 지금은 영금정이라는 데로 다리를 놔서 정자를 지어서 놨어요. 옛날에는 초소 있던 데에 정자가 있었더래요. 지금은 흔적도 없고 내가 왔을 때 솔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이젠 속초라 하고, 또 한가지는 이 설악산 전체가 와우형이다 이거죠.
속초 부근만 그런 게 아니라 전체가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다. 지금 여기 대승폭포 있는 부근에서 대청봉으로 오르는 길이 있어요. 가다 중간에 귀떼기청봉이라는게 있어요. 그게 뭐냐면 소귀에 해당한다는 거요. 백담사 골짜기에도 귀떼기청봉이라는게 있어요. 그 골짜기를 우족동이라해요. 지금 젊은 사람들은 몰라요. 나이 많은 사람이나 알지.
여기 이박사라고 산을 좋아해서 병원도 문닫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87세예요. 그가 설악산 개척의 공로자로 설악산 없이 살 수 없는 분인데 그가 안다닌 데가 없어요.
소의 뒷발에 해당한다. 그런 점에서도 설악산 전체도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다. 이곳 속초도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다. 아주 모든 것이 일치한다. 이거죠. 그래서 누가 뭐라든간에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고 앞에 풀단이 놓여있다 해서 그 소가 풀을 먹고 일을 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지명이다 이거죠.
<박익훈, 남·84, 교동, 1999.12.1>